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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대학의 곳간

입력 | 2017-09-02 03:00:00


김용석 철학자

국가 공동체가 ‘더 나은 삶’을 위한 다양한 개혁을 시도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교육개혁입니다. 현 정부도 국가교육위원회를 설립하고 폭넓은 교육개혁에 시동을 걸고 있습니다. 교육개혁의 스펙트럼은 항상 넓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과정 자체가 통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개혁의 진행 방향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교육개혁의 방향은 초등학교에서 시작해 중학교 입시, 중고교 교육, 대학 입시의 방향으로 진행해 왔습니다. 이는 그동안 개혁의 추동력이 항상 대학 개혁 앞에서 멈추었다는 뜻입니다. 대학부터 개혁하고 그 큰 그림 아래에서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교육 및 각 단계 사이에 있는 입시 개혁이 이뤄졌어야 하는데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대학은 개혁의 사각지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에 대한 관심은 대학 입시 때까지만 한 가정의 일상생활을 점령할 정도이고, 그 다음에 오는 대학 교육 자체는 일상적 관심사 밖에 있습니다.

이런 ‘교육개혁의 역사’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데 있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너무도 당연하게 학교로 알고 있지만 대학교를 학교로 인식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대학교도 학교입니다. 물론 고등학교까지의 교육기관들과 대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교육 중심이지만 대학은 교육과 함께 연구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대학이 연구기관의 역할을 제대로 해 왔는지는 의문입니다. 연구를 하기보다는 연구비 따오기에 급급하지 않았는지 자성해야 합니다. 논문의 질보다는 양에 집중하진 않았나요. 적지 않은 교수들이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업적을 관리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연구 프로젝트가 대학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공적 지원금을 받아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지는 않았나요. 그 지원금이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그간 몸담았던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는 날 새벽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여름 내내 연구실을 정리했습니다. 그간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과 시험지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학부 과정에서도 세미나식 수업을 해 왔던 터라 세미나 발표문, 토론 서기보고문, 사회자 후기, 튜토리얼(tutorial) 자료 등이 상당합니다. 이들을 지금까지 단 한 장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요.

하지만 이들은 제게 지혜의 보고(寶庫)이며 지적 영양가 풍부한 곡물로 가득한 ‘연구자료의 곳간’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연구와 창작의 아이디어 및 명상의 화두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연구 활동의 자극제이자 동료였으며, 학생들이 연구실을 도서관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대학의 곳간’을 채우는 것은 연구지원금이 아니라 성실한 교육과정에서 얻어지는 소중한 부산물들입니다.

대학 교육은 연구의 동기이자 연구 결과의 적용입니다. 현실적으로 연구와 교육은 쉽게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숙한 학자가 신선한 젊은이들과 교류하며 연구할 때 지속적으로 좋은 효과를 냅니다. 바로 이것이 대학이 전문연구기관과 다른 점이며, 대학에서의 연구가 특별하고 가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 대학들은 교육기관의 역할을 회복해야 합니다. 대학 교육이 많은 사람의 일상적 관심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시급하고 엄중한 과제입니다. 이는 대학이 창의적 연구기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김용석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