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영 정치부 기자
공무원의 레토릭(수사)을 믿은 게 순진했을까. 어쩌면 이는 그들이 사는 법에 대한 흔한 일화일지 모르겠다. 고위 공무원에겐 특히 그렇다. 정권의 입맛에 맞추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게 수습 사무관 시절부터 터득한 지혜일 테다. 5년마다 나라를 새로 세우듯 국정철학이 확확 바뀌다 보니 사실 업무 능력만으로는 모자란다. 정권의 코드를 민첩하게 읽고 이를 뒷받침할 정책과 데이터를 착착 생성해내는 정무 감각이 필수다. 공직자들은 이런 자신의 처지를 김수영의 시 ‘풀’에 빗대 ‘바람(권력)보다 더 빨리 눕는다’고 자조한다.
정무 감각이 탁월한 공무원조차도 요즘은 현기증을 느낄 것 같다. 17일 출범 100일째를 맞는 문재인 정부는 정권교체란 무엇인지를 톡톡히 보여주고 있다. 정책 급회전도 본격화됐다. 공약을 내걸고 국민의 선택을 받은 집권 세력이 국정운영 기조를 바꾸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방향 선회는 그 자체가 민의(民意)의 실현이다.
정권 초기에는 집권 세력이 착각할 수도 있다. 각종 부처에서 마술 램프처럼 뚝딱 논리와 통계를 만들어내니 공직사회를 장악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하기 쉬운 게 있다. 1980년대식 ‘반공 개그’로 말하자면 공산주의보다 더 무서운 게 관료주의다. 한 전직 청와대 행정관은 “집권 1년 차에는 부처에 보고서를 가져오라면 금세 만들어 국·실장이 직접 배달 온다. 그러나 3년 차만 지나도 숫자만 난무하고 실제 되는 일은 없는 맹탕 보고서를 전자문서로 쏘는 식”이라고 말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공무원은 영원하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료 공화국’의 덫에 걸리지 않을 것인가. 역설적으로 대통령이 만기친람(萬機親覽·임금이 모든 정사를 친히 보살핌)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너무 나서면 부처 공무원들은 보고서 쓰기에 바쁘고, 눈 밖에 날까 지시를 넘어서는 일을 하지 않는다. 공무원의 ‘영혼’은 결국 집권 세력의 몫이다.
홍수영 정치부 기자 ga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