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범 음악평론가·KBS클래식FM 장일범의 가정음악 MC
그러나 늙고 무력해져 우리 인생의 전기를 맞으면 죽어버린 정열의 흔적이 서글프다. 스산한 가을 폭풍이 초원을 수렁으로 바꾸고 사방의 숲을 벌거벗기듯이.
―알렉산드르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중·번역 석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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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무도회에 가서도 무료해하던 오네긴은 아름다운 그레민 공작 부인이 나타나자 깜짝 놀란다. 예전에 자신이 시골 영지에서 사랑을 거절했던 타티야나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오네긴이 타티야나에게 불현듯 사랑에 빠져 버리고, 타티야나가 그랬던 것처럼 절절한 사랑 고백의 편지를 쓰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로 이루어진 이 아름다운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다섯 번째 오페라로 선택했다. 그중 제3막에서는 바로 이 장면, 즉 소설 속에서는 화자가 하는 말을 오페라 속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돌아온 퇴역 장성인 그레민 공작이 등장해서 “오네긴, 내가 이 늙은 나이에 이렇게 타티야나에게 사랑에 빠지게 될 줄은 몰랐네. 사랑은 그 어떤 나이도 굴복시키네”라면서 베이스의 저음으로 부드럽게 노래하게 만들었다. 그레민 공작은 오페라 속에서 단 한 번 등장하지만 그는 인생의 깨달음을 알려준다. 결국 인생은 사랑이라는 것. 그렇다. 청년 시절엔 사랑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힘든 인생을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사랑은 어떤 나이에도 찾아오므로.
장일범 음악평론가·KBS클래식FM 장일범의 가정음악 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