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모르고 지은 죄란 없다 다만 들키지 않은 죄가 있을 뿐 남들이 모른다고 무죄라면 정권이 백번 갈려도 百年河淸 기억하는 빚-미처 기억 못하는 빚… 둘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죗값 공인이라면 더 혹독하게 치러야
고미석 논설위원
막장 정치 드라마로 뒤범벅이었던 지난해 인상 깊게 보았던 TV 드라마에 가슴 찡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부족한 능력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며 헌신해온 노년의 남편에게 위기가 닥친다. 늘 참아주던 아내의 돌발적 이혼 요구에 분노한 그는 외친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그러다 마음을 바꾼다. 시집와서 모진 구박 당할 때 외면한 것, 유산했을 때 따스한 한마디 건네지 않은 것…. 망각의 구석에 은닉된 오래된 잘못이 줄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느라 바빠 자기 죄를 몰랐다는 늙은 남편의 뼈저린 후회를 드라마는 이렇게 표현했다. 알고 지은 죄 백 가지, 모르고 지은 죄 천 가지 만 가지.
알고 진 죄와 모르고 진 죄, 둘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가끔 기도를 합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모르고 짓는 죄가 있을까요? 저는 그 말을 할 때마다 늘 부끄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알고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고 하용조 목사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궁색한 변명이지 모르고 지은 죄는 거의 없단다. 들켜버린 죄와 들키지 않은 죄가 있을 뿐이라는 냉철한 통찰이다. 죗값 받을 각오 아래 저지르는 죄, 들키지 않길 바라고 저지르는 죄, 죄 지은 바 없노라 자기최면을 거는 죄. 종류는 달라도 무죄는 없다는 뜻인가.
권력과 부, 명예를 가진 이라면 모르고 진 빚, 들키지 않은 죄의 결말이 개인적 반성 차원에서 끝나기는 어렵겠다. 가까이 지낸 누군가에게 부채의식을 느낀 것으로 보이는 전직 대통령이 최근의 사례일 터다. “고맙다, 그런데 여기까지!”라고 선 그을 타이밍을 놓친 것으로 좋게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셈이 바른 사람이면 자신이 유념한 특정한 빚이, 모르고 받은 은혜에 비해 빙산의 일각이란 사실을 인지해야 마땅하다. 지지자들까지 등 돌리게 만든 이유의 근원은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기억하는 빚과 미처 기억 못 하는 빚의 무게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대가는 공인에게 있어 이토록 혹독하다. 그 광경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모르고 진 빚, 모르고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면 무엇보다 겸손할 일이다. 새로 출범한 정부의 행보가 아슬아슬한 이유이기도 하다. 청문회 전후로 위장전입 논문표절 등 과거 자신들이 제기하고 추궁했던 진부한 아이템들이 시대를 초월한 레퍼토리처럼 되풀이되는데 옛날과 성격이 다르다고 우기는 퇴행적 행태가 딱하다. 누가 묻지도 않는데 늘 스스로 떳떳하다 정의롭다 외친 사람들이라면 누가 뭐라 안 해도 부끄러워 내부에서부터 왜 우리가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혹독히 자아비판하고 끝장토론이라도 벌이나 했는데, 역시 아니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