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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간 자유를 사다… 베를린장벽 허문 ‘프라이카우프’의 힘

입력 | 2017-06-10 03:00:00

[토요판 커버스토리]이산상봉 통일 전 독일은




독일 통일 전 시행된 프라이카우프 정책에 따라 동독에서 석방된 정치범들이 두 대의 버스를 타고 동서독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향하고 있다. 서독은 프라이카우프를 통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7년간 3만3755명의 동독 정치범에게 자유를 찾아줬다. 벨트 홈페이지 캡처


2009년 10월 싱가포르. 임태희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2015년 12월 사망)이 비밀리에 만났다.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 정상회담에 가장 근접했던 이 비밀접촉의 코드명은 백두 프로젝트였다.

임 장관은 김양건에게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를 제의하면서 상봉이 실제 이뤄지면 쌀 30만 t을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이를 계기로 대화의 물꼬를 터 남북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한 뒤 이명박 대통령이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일부를 고향 방문이나 송환 형식으로 데리고 귀환하는 방안을 북측과 논의했다.

훗날 임 전 장관은 채널A와의 인터뷰(2012년)에서 이 방식을 “프라이카우프”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이명박 정부 내 대북 대화파와 원칙파의 갈등으로 결국 무산됐고, ‘한국판 프라이카우프’도 빛을 보지 못했다. 독일 통일 전 서독이 동독 정치범들을 데려오기 위해 추진한 프라이카우프를 한국에 적용하겠다는 것은 이산가족 납북자 국군포로 상봉이나 송환을 대가로 북한에 쌀 등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뜻한다.



27년간 비밀에 부쳐진 정치범 송환 프로젝트

도대체 프라이카우프가 어떤 정책이었기에 남북 비밀접촉의 주요 화두로까지 등장했을까. 프라이카우프(Freikauf)는 독일어로 ‘자유를 산다’는 의미다. 경제적 대가를 지급하고 동독 내 정치범을 서독으로 송환하는 프로젝트였다. 1963년부터 1989년 11월 9일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무려 27년간 지속됐다.

염돈재 전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동독 정치범 3만3755명이 프라이카우프를 통해 서독에서 자유를 찾았다. 동독 정치범 가족 25만 명도 서독 땅을 밟았다. 서독은 송환 대가로 모두 34억6400만 마르크(당시 환율 기준 약 1조8350억 원)어치의 현물을 동독에 지급했다. 정치범 1인당 ‘몸값’은 평균 10만 마르크(약 5300만 원)였다. 염 전 원장은 독일 통일 때인 1990년 주독일대사관 공사, 노무현 정부 때 국가정보원 해외담당 1차장을 지냈다.

프라이카우프의 시초는 1962년이었다. 서독의 개신교연합회가 동독에 수감돼 있던 성직자 150여 명을 서독으로 데려오면서 동독에 트럭 3대분의 옥수수와 석탄을 몸값으로 지불한 것. 1963년에는 서독 정부가 처음 나섰다. 정치범 8명과 서독에 부모가 있는 어린이 20명을 서독으로 송환받았다. 대가로 동독 정부에 32만 마르크를 줬다.

이후 서독 정부 차원의 프라이카우프가 본격화됐다. 하지만 서독 정부는 프라이카우프를 철저히 비밀에 부친 뒤 실제 실행은 개신교연합회 측에 위임했다. 염 전 원장은 “인도적 차원의 사업이 정치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정부가 뒤로 빠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독 측은 협상 과정에서 동독 측에 먼저 석방 대상 정치범 명단을 달라고 요구했다. 동독이 심사를 거쳐 석방 대상을 서독에 통보하면 양측은 정치범 1명당 현물로 지급할 금액과 지불 방식을 결정했다. 1963∼1983년 몸값의 수준은 1인당 4만 마르크 선이었다. 이후 1989년까지 평균 9만5700마르크로 올랐다. 현물 수송료 등을 포함하면 정치범 1명당 10만 마르크를 상회했다.

동독은 프라이카우프 시행 초기에는 바나나 등 식품과 소비재를 선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물 규모가 커지자 원유, 구리, 은, 공업용 다이아몬드 등 원자재 등을 원했다. 당시 서독은 은 외에 대부분의 현물을 수입을 통해 조달했다.



서독은 인도적 이유로, 동독은 체제 안정 위해

프라이카우프를 둘러싼 서독과 동독의 셈법은 달랐다. 서독은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동독 주민들이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사살되거나 투옥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반면 동독 정부는 프라이카우프를 이용해 체제 비판 세력을 서독으로 방출할 수 있었고 이와 동시에 현물도 확보할 수 있었다.

독일 통일 이후 의회에서 프라이카우프에 대한 평가가 진행됐다. 긍정적 영향으로는 △프라이카우프 과정에서 동서독 주민 간 교류가 지속됐고 △동독 주민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 동독 정권의 정통성을 약화시켰으며 △다수의 지식인과 기능인이 동독을 떠나면서 동독 체제 붕괴에 기여했다는 점이 꼽혔다. 부정적 영향으로는 △정치범 석방이 역설적으로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을 약화시켜 동독의 변화를 늦췄고 △몸값이 동독 집권층 권력 기반 강화에 이용됐다는 점 등이 꼽혔다. 동독에 제공된 물자가 동독 주민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염 전 원장은 “프라이카우프를 한국의 이산가족 납북자 국군포로 문제에 적용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동독이 프라이카우프에 협조적이었던 건 정치범 석방을 통해 동독 체제의 ‘관용’을 서독 정부에 과시하려는 체제 선전 효과를 노린 측면도 있었지만 북한은 다르다는 것이다. 납북자 국군포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산가족 상봉이 북한 체제 선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프라이카우프의 진짜 힘은 27년간 정책이 지속됐다는 사실에 있다. 그 기간 동안 우파 기독교민주연합과 좌파 사회민주당이 번갈아 가며 집권하며 6명의 총리를 배출했지만 누구도 프라이카우프를 중단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이 바뀌는 한국에서 가능한 일일까? 통일부 당국자는 “(이산가족 상봉 정책을 비롯한) 대북정책의 성패는 정권이 바뀌어도 지속되는 정책 수립에 있다”고 지적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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