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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현의 뉴스룸]어느 공무원의 퇴임

입력 | 2017-05-18 03:00:00


노지현 사회부 기자

25년 8개월 동안 서울시의회 공무원으로 일한 안준희 씨(57·여)는 최근 시의원과 사무처 선후배들에게 ‘정든 서울시의회를 떠나며’란 e메일을 보냈다. 안 씨는 1991년 서울시 지방별정직 5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94년부터 서울시의회 소식지를 발행했다. 1995년부터 각종 의정자료를 수집해 3∼8대 서울시의회 의정백서 발간에 기여했다. 서울시의회 홈페이지에는 안 씨가 모은 체계적인 기록이 고스란히 올라와 있다. 연구자나 유권자도 쉽게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안 씨는 어떻게 보면 유별난 공무원이었다. 2004년 출퇴근길에 차를 몰고 다니며 서울 7개 자치구에서 불법 광고물을 수거했다. 누가 시킨 적도 없었고 생색이 나는 일도 아니었다. 지금도 강남 지역 유흥가나 인근 길거리에 불법 전단이 뿌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에는 주택가도 가리지 않고 뿌려졌다. 일부 동네에서는 야한 사진과 성매매 문구가 적힌 명함 크기의 전단이 매일 밤 골목을 채웠다. 초중고생이 등굣길에 쉽게 주워 볼 정도여서 부작용과 폐해가 극심했다. 대리운전 불법 현수막부터 ‘인신매매 아닌가’ 눈을 의심케 하는 국제결혼 광고 전단까지 판을 쳤다.

안 씨는 3개월 넘게 거리와 골목을 돌아다니며 용달차 3대에 나눠 실어야 할 분량인 1.5t의 전단을 줍고 다녔다. 서울시에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지만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신기한 공무원이 있다’며 언론사 몇 군데에서 보도하자 “시장이 알기라도 하면 어쩌냐”며 질타하는 간부마저 있었다고 한다.

안 씨는 광고물을 수거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전단을 일일이 분류해 ‘환경순찰견문보고서’를 작성해서 시에 냈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이명박 서울시장의 반응은 여느 간부들과는 달랐다. “여직원 하나도 저렇게 애쓰는데 국장들은 뭐했느냐.” 간부들의 우려와는 달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예 시 예산을 들여 안 씨가 수거한 음란 전단과 불법 현수막을 서울광장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음란 전단인 만큼 전시회는 성인만 입장하도록 했지만 입소문은 빨리 퍼졌고 자치구들도 그제야 단속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제 웬만한 동네 골목에 낯 뜨거운 광고물이 발길에 채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이후에도 그는 시민의 관점에서 불편한 일이 있으면 꼭 자치구나 서울시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자동차를 인도에 못 들어오게 하는 말뚝 모양의 볼라드(bollard·원통형 장애물)가 오히려 유모차나 노인과 시각장애인의 보행을 불편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문제되는 지점의 사진을 찍어 해당 구청에 보내 의견을 접수시켰다.

그는 26년에 이르는 공직 생활의 소회를 e메일 고별사에서 표현했다. 자신이 복무한 직장에 대한 고마움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듣기에 불편한 대목도 적지 않다. 고위 공무원이라면 쓴소리로 받아들일 만한 문장도 있다. 떠나는 마당에 굳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도 있긴 하다. 그러나 안 씨가 지난 26년간 어떻게 공직 생활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답네”라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나 하나 나선다고 조직이 바뀌나, 세상이 바뀌나’ 싶은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안 씨를 보면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돌이켜 보게 된다.

노지현 사회부 기자 isit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