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 출판평론가
영국 런던의 세실코트에 있는 골즈버러 서점은 저자가 직접 서명한 초판본만 판매하는 서점이다. 조지 오웰이 서명한 ‘동물농장’ 초판은 우리 돈 약 380만 원,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초판 저자 서명본은 75만 원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의 책을 앞으로 저명하게 될 가능성을 판단하여 매입해 두기도 한다. 될성부를 떡잎을 판단하는 감식안이 필요한 셈이다.
저자 서명본 수요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작가도 있다. 현대 미국 작가 존 업다이크는 자신의 작품들 중 일부를 엄선하여 수백 부만 인쇄한 뒤, 책에 직접 서명하곤 했다. 저자 서명본을 모으는 수집가들은 반송용 우표를 넣어 작가에게 책을 보내 서명을 부탁하기도 한다. “하루에도 대여섯 권씩 사인을 부탁하는 책들이 배달되어 책상에 쌓이곤 한다.” 미국 작가 제임스 미치너의 말이다.
이런 증정본에는 ‘받아 간직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의 ‘혜존(惠存)’을 상대방 이름 뒤에 쓰거나, ‘삼가 씁니다’라는 뜻의 ‘근지(謹識)’를 저자 자신의 이름 뒤에 적기도 한다. 한자 ‘識’은 알다, 분간하다 등을 뜻할 때는 ‘식’으로 읽지만 기록하다, 표시하다 등을 뜻할 때는 ‘지’로 읽는다. 책은 펴냈을 때가 아니라 독자가 읽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저자의 서명 행위는 ‘부디 이 책을 저와 함께 완성하여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정중한 당부이자 문화적 소통 행위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