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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플러스]“합치지 않으면 할 게 없다…‘한 우물’ 파되 넓게 파라”

입력 | 2017-03-28 03:00:00

21세기형 인재란? ‘융합형 인재의 본보기’ 조장희 박사에게 듣는다




조장희 박사는 “학문은 ‘세계 최초’라야 가치가 있다. 세계 최초를 어렵게만, 남의 얘기로만 여기지 말라”고 당부했다.


제4차 산업혁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융합이다. 생명공학 나노산업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등 혁신을 주도하는 첨단기술은 의학 물리학 생물학 전자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결합하고 증폭되면서 발전 속도를 더해간다. 한 가지만 잘해서는 안심 못할 융합과 통섭의 시대다.

뇌과학자 조장희 박사(81·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특임연구위원)는 ‘융합형 인재’의 본보기다. 전자공학에서 물리학, 신경과학으로까지 학문의 폭을 넓힌 그는 카이스트에서 전기·전자공학,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방사선물리학,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방사선학과 신경과학을 가르쳤고 가천대 뇌과학연구소를 10년간 이끌었다.

원리가 서로 다른 컴퓨터단층촬영(CT),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자기공명영상(MRI)을 넘나들면서 원형(圓形) PET, 7T MRI, PET-MRI 융합기 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는 업적이다. 예상대로, 그는 인터뷰 첫머리부터 ‘융합교육’을 강조했다.

“중국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 많던데 이 나라가 스텔스기와 항공모함, 달 탐사선까지 만든다. 온갖 최첨단과학이 집약된 것들인데 우린 손도 못 대고 있다. 배 잘 만든다고 항공모함 만들 수 있나. 항공모함 1척 승무원이 5000명인데 전산학, 전자공학 등의 발전에 힘입어 수년 내 3000명이 AI나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다. 이젠 융합해서 가르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 요즘은 국내 대학에서도 융합교육을 많이 시도하던데.


“그나마 학부에선 융합, 융합하면서 이것저것 해보려고 하는데 정작 융합교육을 본격화해야 할 대학원에선 제대로 안되고 있다.”

- 왜 그런가.

“새로운 분야를 하려면 처음엔 용어들도 낯설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다. 어느 단계까지는 고생 좀 할 각오를 해야 하는데 교수도 학생도 그걸 꺼린다. 다른 데 가서 창피 당할까봐 자기 것만 하려고 든다. 이게 무슨 학문적 전통처럼 굳어졌다.”

- ‘한 우물 파기’는 권장할 덕목 아닌가.

“한 우물 파지 말라는 게 아니다. 우물을 계속 넓혀가라는 얘기다. 학부에서 자기 분야의 기초를 탄탄하게 닦고 대학원에선 그걸 바탕으로 융합연구에 나서야 한다. 물리, 화학, 생물 다 합쳐야 된다. 울타리 쳐놓은 전통학문은 이미 다 긁어 먹었다. 더는 단맛 날 것이 없다.”

- 그러다 집토끼, 산토끼 다 놓치면….

“물리 공부한 사람더러 연극 연출을 하라는 게 아니잖은가. 자기 것을 뿌리로 해서 인접 학문으로 자꾸 가지를 뻗으라는 거다. 기존에 공부한 걸 가지고 새 분야로 오면 블루오션이 널려 있다. 내 주머니가 든든하니 새 분야에서 금방 두각을 드러낼 수 있다. 내 경우, 전자공학에서 물리학으로 옮겨와 계기 분야에 주력하니 전자공학 지식 덕분에 경쟁력이 있었다. PET를 연구할 때는 물리 공부한 덕을 톡톡히 봤다. 과학자는 둘 중 하나다. 제자리에서 청소하고 정리만 하는 사람,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사람.”

- 의학 공학 물리학 심리학 등과 두루 연결된 뇌과학은 전형적인 융합학문인 듯하다. 전망은 어떤가.

“뇌는 놀랍도록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여느 장기들과 달리 해부해 봐도 잘 모른다. 워낙 모르는 분야라 하는 것마다 새롭고, 재미있고, 앞으로 할 것도 많다. 좀 막막하긴 하지만 기회도 그만큼 많다. AI 등 가지를 뻗을 영역도 무궁무진하다. 다른 분야 전공자들이 많이 도전하기 바란다. 과학은 어차피 모험이다.”

-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우리 학생들이 그런 모험을 감당할 자질을 갖췄다고 보나.

“비록 비정상적인 공교육을 받았지만 대부분 매우 우수하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케어(care)하는 교수의 리더십이다. 학생들은 각양각색이다. 연구는 많이 하는데 글을 잘 못쓰는 학생, 꾀는 좀 부려도 핵심을 빨리 잡아내는 학생, 남 돕는 것을 잘하고 즐겨하는 학생 등등. 이들의 다양한 재능이 팀워크로 녹아들게끔 이끌어야 한다. 그래서 논문은 여럿이 함께 쓰는 것이다.”

- 카이스트 교수 시절 약 30명의 박사와 100여 명의 석사를 길러냈다. 어떤 리더십을 발휘했나.


“그들을 제자이자 파트너로 여겼다. 논문을 함께 쓰는 동료의식으로 협업했다. 학생들이 처음엔 내가 하느님인 줄 안다. 질문도 하나 못한다. 그러다 몇 년 지나면 내가 놓친 것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그들도 나를 리드한 것이다.”

- 선행학습이 논란을 빚고 있다. 초등학생에게 고교 수학을 가르치기도 한다. 과학 영재로 키우는 데 도움이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뇌과학자의 시각에서 봐도 어릴 때는 놀기도 잘 놀아야 뇌가 정상으로 자랄뿐더러 나중에 밤새워 연구할 체력도 기를 수 있다. 공부는 좋아서 하는 사람을 못 당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버거운 공부에 시달린 아이들이 대학, 대학원 가서 밤새도록 공부하고 주말에도 연구실 나오고 싶어할까.”

- 사교육 안 받고는 대학 가기 힘든 현실에서 너무 이상적인 말씀 같다.

“입시제도를 바꿔야 한다. 사실 학부에서 어떤 신입생을 뽑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96점 받으면 붙고 95점이면 떨어지는 게 말이 되나. 시험 전날 푹 자서 컨디션 좋으면 2, 3점은 더 나올 건데. 최소한의 자격시험만 통과하면 각 대학이 여러 기준으로 다양한 자질을 판단해서 학생을 뽑게 해야 무의미한 경쟁을 없앨 수 있다. 학부보다는 대학원에서 어떤 인재를 선발하느냐가 관건이다. 대학을 연구중심 대학(대학원 중심)과 교육중심 대학(학부 중심)으로 나눠 육성할 필요가 있다.”

- 그렇게 나눈다고 연구 역량이 강화될까.

“경쟁력 있는 연구중심 대학을 10개쯤 선정한 뒤 전국 대학에 분산된 연구 기능을 끌어모아 국가적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해당 대학 스스로도 연구비 투자에 인색해선 안 된다. 국가는 그에 상응해 연구 예산을 지원하면 된다.”

- 선택과 집중?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비 투자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성과는 참담하다. 학문적, 산업적 파급효과가 엄청난 ‘빅사이언스’(Big Science·입자가속기, 거대망원경, 수백만 볼트급 전자현미경 등 대규모 과학연구시설을 기반으로 한 장기 프로젝트)에 힘을 모아 뛰어들기보다 쁠뿔이 흩어져 고만고만한 연구나 붙들고 있는 탓이다. 연구비가 아무리 많아도 선택과 집중 없이 끼리끼리 자잘하게 나눠 가지면 아무것도 못하는 푼돈이 된다. 융합이 대세인 요즘 과학은 양도 숫자도 커지고 있다. 연구비 제안-심사-선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될성부른 연구중심 대학, 우리가 주도할 만한 빅사이언스를 선별해 힘을 몰아줘야 한다.”

- 돈도 돈이지만 빅사이언스 연구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데.

“오랜 커리어를 지닌 학자들이 분야마다 연구 성과를 차곡차곡 축적하고 그런 기반 위에 첨단 연구를 한 층, 한 층 쌓아 올려야 하는데 우리는 뿌리가 너무 약하다. 첨단 연구의 세계적인 흐름과 현안에 어둡다. 젊은 과학도들이 본 게 없고 간이 작아 빅사이언스는 엄두를 못 낸다. 핵심 연구인력은 의탁할 곳을 찾아 해외로 나간다. 우리 힘으로 안 되면 톱레벨의 외국 학자들을 데려오는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고액 연봉 주는 걸 배 아파하면 메인스트림 사이언스는 못한다. 일본은 140년 전 도쿄대를 설립할 때 일본인 교수인력이 부족하자 독일 교수 수십 명을 당시 일본 관리 봉급의 30배를 주고 모셔와 ‘독일 대학처럼 만들어달라’고 간청했다.”

- 답답한 얘기를 듣고 나니 노벨상은 요원해 보인다.

“조급해할 일은 아니다. 우린 과학연구 역사가 짧다. 도쿄대와 베이징대만 해도 서울대보다 각각 70년, 50년 앞서 설립됐다. 그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연구 성과가 쌓였겠나. 1972년 캘리포니아대 부교수가 됐을 때 한국인 교수는 내가 유일했는데 일본계와 중국계 교수는 그때 벌써 차고 넘쳤다. 요즘 어지간한 과학 논문에 중국인 이름이 저자로 안 들어간 경우가 드물다. 우리도 제대로 공부하고 시간이 좀더 흐르면 자연스럽게 기회가 찾아오리라 본다.”

- 과학·수학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의대와 치대로 몰려든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것도 시간이 웬만큼 해결할 문제다. 지금 부모들은 넓은 의미에서 ‘빈곤탈출 1세대’다. 외환위기, 조기퇴직 등을 직접 목격했기에 자녀를 그저 안전하게만 키우려고 한다. 이 고비를 넘겨야 ‘너 하고 싶은 것 해라’ 하는 시대가 온다.”

꿈의 14T MRI

자신이 개발한 7T MRI 뇌 사진 앞에 선 조 박사.


조장희 박사의 연구실 정면 벽엔 사진 액자들이 나란히 걸려 있다. 1975년 개발한 원형 PET를 비롯해 0.1T·2T·7T MRI 등 그의 손끝에서 세계 최초로 탄생한 자식 같은 ‘작품’들이다. 그런데 맨 오른쪽 액자엔 사진은 없이 ‘14’라는 숫자만 여러 개 인쇄돼 있다. 그가 필생의 역작으로 꿈꾸고 있는 14T MRI 사진이 들어갈 곳이다.

‘T’는 자장(磁場)의 단위인 ‘테슬라(Tesla)’다. 1T는 1만G(가우스)로, 나침반 바늘을 움직이는 지구 자기장(0.2G)의 5만 배 크기다. 뇌영상 촬영장비에선 이 단위가 높을수록, 즉 자장이 클수록 신호가 많이 나와 영상의 선명도가 높아진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MRI는 가장 선명한 것이 3T다. 현존 최고 해상도의 7T MRI는 0.3mm 굵기의 뇌혈관 상태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지만 전 세계에 70여 대밖에 없는 ‘연구용’ 수준이다.


조 박사가 도전하는 14T MRI는 7T보다 4배 더 선명한 영상을 제공한다. 따라서 극미세 혈관의 이상 징후도 일찍 발견해 뇌출혈 치매 파킨슨병 알츠하이머병 등 고령화 사회에서 급증하는 뇌혈관 질환을 조기 진단할 수 있다.

이런 고해상도 MRI를 활용해 만든 정밀한 ‘뇌지도’를 바탕으로 ‘심부뇌자극술’을 시행하면 놀라운 성과가 기대된다. 가령 뇌의 특정 신경 다발을 자극하면 우울증을, 또 다른 신경 다발을 자극하면 파킨슨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 뇌활동과 관련이 깊은 통증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비만 식물인간 등도 치료의 길이 열린다.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약물중독 폭력 범죄 자살의 여지를 줄이는 예방책이 될 수 있고, 뇌의 구조와 활동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 되면 이를 응용해 더 정교하고 효율적인 AI를 만들 수도 있다.

“과학은 망원경, 현미경과 더불어 발전했다. 인간이 더 멀리,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더 높은 해상도의 뇌영상 촬영기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뇌의 신비를 한 꺼풀 더 벗겨낼 것이다. 뇌과학이 발달하면 우리는 ‘완전한 사회’에 좀더 가까워진다.”

글·이형삼 전문기자 hans@donga.com
사진·김재명 기자 ba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