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육아 위해 직장도 박찼지만… ‘전업 아빠’ 내색 못하고 쉬쉬

입력 | 2017-03-25 03:00:00

[토요화제]‘샤이 대디’를 아시나요




‘육아 성벽’이 무너지고 있다. 아내와 함께 아이를 돌보는 남편의 모습은 이제 자연스럽다. 하지만 남편이 육아를 도맡았을 때는 사정이 다르다. 여전히 일가친척이나 직장 안에서의 시선은 따갑다. 부모나 집안 어른들은 “유난 떤다”고 흉보고, 직장 동료들은 “일은 뒷전인 무능한 동료”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시선 탓에 숨어서 육아를 하는 아빠들이 늘고 있다. 바로 ‘샤이 대디(shy daddy·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육아 지지층)’다.

‘행복상상나무’는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하는 아빠들의 모임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육아 정보를 나누고 한 달에 2, 3번 모임도 갖는다. 주로 서울에서 모이는데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의 샤이 대디가 몰린다. 행복상상나무 창립 멤버인 김민영 씨는 “육아 문제로 상사로부터 핀잔을 들었던 아빠들이 뭉친 모임”이라며 “마음 터놓고 육아 이야기를 할 곳이 없는 아빠들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모임을 찾는 아빠 37명 중 28명이 “육아 티내는 게 손해”라며 자신이 샤이 대디라고 고백했다.

지난해 이 땅에 태어난 아이는 40만6300명. 1970년 이후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10년간 정부가 저출산 대책에 무려 80조 원을 쏟아부었지만 아이 울음소리는 갈수록 잦아들고 있다. 여기에는 육아에 적극적인 남자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사회 분위기 탓도 있다. 아빠들은 “한국 사회는 육아활동을 하는 아빠를 치켜세우기보다 무능하게 보고 특이한 사람이라며 깎아내린다”고 꼬집었다. 아이 돌보는 아빠를 유별나게 보는 사회에서 용감하게 샤이 대디임을 고백한 아빠들을 만났다.



‘육아 성지’ 블로그 운영자가 아빠?

황성한 씨가 퇴근 후 집에서 두 아이와 피자를 만들고 있다. 아이들은 아빠의 퇴근을 항상 기다린다. 황 씨는 아이들과 즐긴 순간들을 블로그에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초록감성님이 접속하셨습니다.”

오전 4시. 황성한 씨(38)는 어김없이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자신의 블로그에 접속했다.

쏟아지는 육아 질문에 정신없이 댓글을 달고 나니 오전 6시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만원 버스 출근길. 황 씨의 손은 바쁘다. 스마트폰으로 전날 아이들과 했던 피자 만들기 과정을 글로 풀어 사진과 함께 블로그에 올린다.

회사 도착 10분 전. ‘수정 완료.’ 아이들이 밀대로 피자 도를 만드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까지 올리고 나서야 포스팅 작업이 끝났다.

오전 8시 30분. 연구원인 황 씨는 복장을 갖춰 입고 연구실로 들어갔다.

“굳이 동료들에게는 육아 블로그 얘기를 꺼내지 않아요. ‘유난 떤다’거나 ‘찌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블로그는 아이와 함께 쓴 아빠의 일기이자 초보 부모들의 교육서 같은 공간이죠.”

다음 날 오전 4시. 알람 소리에 깬 황 씨가 컴퓨터를 켰다.

“초록감성님이 접속하셨습니다.” 연구원과 육아 블로거. 황 씨의 이중생활은 오늘도 주욱∼ 계속된다.



‘딸을 위해서!’ 육아수업 찾아 삼만리

12일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서 열린 육아수업에 참가한 아빠 김태규 씨가 딸 꽃송이 양과 함께 공놀이를 즐기고 있다. 그는 30개월 된 딸과 단둘이 하는 외출을 즐기고 이유식도 직접 만들어 먹인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아버님만 오신 거예요?”

26개월 된 딸아이를 안고 서 있는 아빠 김태규 씨(34)에게 직원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녀가 도착한 곳은 육아교실이 열린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 문화센터. 수업 신청은 여성, 즉 엄마만 가능했다.

“같이 왔는데, 엄마는 회사에 일이 생겨서 급히 갔어요.” 김 씨가 능숙하게 둘러댔다. 3일 전 그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해당 육아교실을 발견했다. 수업 제목은 ‘엄마와 함께하는 체조’. 30개월 미만 육아 프로그램이 많지 않은 탓에 본인이 직접 참여하고 싶었다. 결국 아내 이름을 빌려 신청했다.

놀이수업이 시작됐다. 아장아장 노래에 맞춰 신나게 걷는 딸을 보며 김 씨는 행복했다. 10여 명의 엄마가 보내는 이상한 시선쯤은 감내해야 했다. 김 씨는 딸과 함께 50번 넘게 이런 육아 프로그램을 찾아다녔다. 남의 동네 문화센터부터 낯선 지방까지. 대부분 아내 없이 나선 부녀만의 외출이었다. 직장도 오후 출근이 가능한 곳으로 옮겼다.

“주변에 ‘육아 대디’가 많아졌다곤 하지만 아직도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에 위축될 때가 있죠. 제가 정말 이상한가요?”

김 씨는 아내 이름으로 가입한 육아맘 온라인 카페에서 ‘열혈 엄마’인 척 이유식 정보를 물어보고 자신이 개발한 레시피도 올린다. 간혹 회식이 있을 때도 “아내가 아프다” “아이가 아프다”며 둘러대고 아침에 만들어 먹일 이유식 재료를 사러 간다. 딸 송이를 사랑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이다.



엄마들과 함께하는 ‘전업 아빠’의 고군분투

7세와 4세 남매를 키우는 김영태 씨(40·가명)는 3개월 차 ‘전업 아빠’다. 회사 다닐 때 그는 아이들의 웃는 모습보다 자는 모습을 더 많이 봐야 했다. ‘이렇게 살려고 결혼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김 씨는 결국 사표를 냈다. “작은애가 열 살 될 때까지만 전업 아빠로 살자”고 마음먹었다. 육아는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문제는 동네 엄마들의 텃세였다. 젊은 육아맘들은 전업 아빠인 그를 멀리했다.

“전업 아빠라고 소개하니까 색안경을 끼고 보더라고요. 그래서 사업 구상 중이라고 둘러댄 적이 많죠.”

김 씨는 아파트 인근 카페에 모여 있는 엄마들을 무작정 찾아갔다. 살아 있는 육아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하지만 육아보다 힘든 게 엄마들의 길고 긴 수다를 들어주는 일이었다. 작전을 바꿨다. 동네 엄마들이 편하게 쉴 수 있게 함께 온 아이들 10명을 맡아서 돌봤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다. 마침내 김 씨는 엄마들이 모인 ‘단체 카톡방’에 초대됐다. 그는 “단톡방에서 태권도 학원이 어디가 좋은지 물어보고 엄마들의 조언을 받는다”고 뿌듯해했다.

그는 이제 집 근처의 시설 좋은 키즈카페가 어디 있는지, 육아용품 중고시장이 언제 열리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마트에서 만난 엄마들이 김 씨를 먼저 반길 정도다. 하지만 양가 부모도, 동성 친구들도 아직 그를 격려하는 걸 꺼린다. 김 씨가 ‘육아휴직 중’ ‘사업 구상 중’이라고 어설픈 거짓말을 계속하는 이유다.

동아일보는 사단법인 ‘함께하는 아버지들’과 함께 육아에 적극적인 30, 40대 아빠 47명에게 물었다. 절반에 가까운 21명이 “직장 동료들에게 자신이 ‘육아 대디’인 걸 티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대가 변했지만 사람들은 변한 게 없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김태규 씨는 “지하철에서 ‘엄마는 어디 갔냐’며 혀 차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영태 씨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면 상사로부터 “회사 일도 못하면서 애만 잘 보면 되겠어”라는 핀잔을 들었다. 황성한 씨도 동료들 앞에서 ‘육아 고민’을 꺼냈다가 “일은 뒷전”이라는 오해를 샀다.

육아 대디를 격려하지 않고 주눅 들게 하는 주변의 말과 행동이 샤이 대디를 낳은 셈이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