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앤터니 비버 지음/김규태 박리라 옮김/1288쪽·5만5000원·글항아리
1944년 6월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 공수부대에 투항한 한국인 양경종(왼쪽). 18세 때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다가 차례로 소련군과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힌 그의 서글픈 삶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머리말이다. 글항아리 제공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로 공포와 증오가 되풀이되는 가운데 선동적인 발언들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될 우려를 낳았다. 이원론이 부상하며 타협을 기저로 한 민주적 중도주의는 깨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이 등장한 집단주의 시대에 군인은 물론 좌우 양측 지식인들도 폭력적 해결을 더없이 훌륭한 난국 타개책으로 여겼다.”
전제를 지우고 따로 떼어내 읽을 때 이 문장들을 ‘20세기’에 국한한 이야기라 여길 수 있을까. 평화는 당연한 것인 양 오해받기 쉽다. 전쟁을 벗어난 시기에 과거의 전쟁에 대한 고찰을 이어가는 건 그 안이한 오해를 경계하려는 노력이다.
첫 장을 넘기며 잡은 목표는 어떻게든 기사 마감 전까지 최대한 많은 분량을 읽어 넘기는 것이었다. 원작자의 글맛 덕인지 번역문의 성과인지 알 길 없으나 막힘없이 술술 읽히도록 정리한 문장이 책의 물리적 부담을 덜어준다. 첫머리에 삽입한 자료사진의 주인공이 한국인인 점도 몰입의 탄력을 더한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를 침공했을 때 한 젊은 독일군 병사가 미군 공수부대에 투항했다. 한국인 양경종. 그는 1938년 18세 때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 관동군에 배치됐다가 1년 뒤 만주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붙잡혔고, 다시 소련의 붉은 군대에 투입됐다가 1943년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에게 붙잡혔다.”
영국 포로수용소에 구금됐다가 석방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과거를 숨긴 채 살다가 1992년 일리노이 주에서 사망했다는 이 한국인의 기구한 삶 이야기는 수십 년 전 지구 위를 뒤덮었던 포화가 모든 지구인의 삶을 뿌리째 뒤흔들었음을 아프게 확인시킨다.
대개의 세계사 책이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을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잡는 반면 이 책은 그보다 3개월 앞서 벌어진 소련군과 일본군의 노몬한 전투를 서막에 배치했다. 이때 예상 밖의 참패를 당한 일본이 1941년 겨울 독일의 소련 공격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전쟁의 판도가 갈렸다고 본 것이다.
“역사는 결코 깔끔하지 않다”고 전제한 저자는 지구 위에서 같은 시기에 벌어진 주요 사건들이 한줄기로 엮여 있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서구의 시선에서 당연한 듯 정리돼 고정된 전쟁사의 틀을 벗어나 유럽과 아시아의 변화를 균형 있게 살폈다. 묵직한 책거리의 쾌감을 만끽하고 싶은 독자에게 도전을 권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