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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사람 정신병원 수용’ 막는다

입력 | 2017-03-01 03:00:00

정신질환자 오랫동안 안돌본 가족, 강제입원 신청 제한
복지부, 개정 시행령 3월중 입법예고




정모 씨(60·여)는 아직도 20여 년 전의 악몽에 시달린다. 1994년 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불면증을 앓다가 오빠의 손에 이끌려 강제입원당한 기억 때문이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것 말고는 별 증상이 없었던 정 씨는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는 19년 새 정말로 환청과 망상에 시달리는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가 됐다. 2013년 퇴원했을 땐 평소 왕래가 없었던 언니가 자신의 기초생활 급여를 전부 쓴 상태였다. 정 씨는 “요즘도 언니가 ‘○○리(정신병원이 있던 지역)로 돌려보낸다’며 겁을 줄 때 가슴이 철렁한다”고 말했다.

5월 30일부턴 정 씨처럼 정신질환자를 오랜 기간 돌보지 않은 가족은 강제입원을 신청할 수 없게 된다. 보건복지부는 정신질환자를 강제입원시켜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보호의무자의 범위에서 △부양의무를 명시적으로 거부·포기하고 장기간 사실상 이행하지 않았거나 △고령·질병·장애로 의사결정 능력이 부족한 가족을 제외하는 내용의 개정 정신건강복지법(현 정신보건법) 시행령을 이달 중 입법예고할 방침이다.

정부가 보호자의 범위를 좁힌 것은 그간 상속·유산 등 재산 다툼,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없거나 증상이 경미한 환자를 강제입원시키는 인권침해 사례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정신병원 입·퇴원 관련 진정은 2012년 1211건에서 지난해 1668건으로 37.7% 늘었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2014년 10월 현 강제입원 조항 폐지를 권고했고,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9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정신건강복지법이 전면 개정되는 것은 1996년 제정 후 처음이라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가장 큰 쟁점은 “환자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어야 강제입원을 시킬 수 있다”는 조항이다. 입원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강력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위험한 일부 환자도 풀려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복지부는 ‘자해 위험’의 범위에 자살·자해를 시도할 위험이 있는 경우뿐 아니라 증상 악화나 약물 복용으로 인해 환자의 건강이 위험한 경우까지 포함시키고, ‘타해 위험’엔 다른 사람의 신체뿐 아니라 재산, 명예를 침해할 위험이 있는 경우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시행 초기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강제입원의 필요성을 판단할 수 있는 재량을 넓게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설명이다.

강제입원의 적절성을 평가할 전문의 인력을 갖추는 작업은 좀 더 까다롭다. 현재는 보호자 2명이 동의하고 전문의 1명이 진단을 내리면 강제입원이 가능하지만, 개정법 시행 이후엔 다른 병·의원 소속 전문의가 추가로 찬성해야 2주 이상 강제입원시킬 수 있게 된다. 복지부는 강제입원으로 인해 ‘제2 전문의’의 진단을 받아야 하는 사례가 연간 12만9863건일 것으로 추산했다. 의사 1명이 하루에 환자 12명을 진단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51명의 전문의가 진단 업무에만 매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전문의들의 업무 부담이 지나치게 높아져 제대로 된 진료와 진단이 이뤄질 수 없다며 법을 재개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복지부는 우선 국립정신건강센터에 전문의 16명을 충원해 타 병원의 강제입원 진단 지원을 전담하는 ‘기동팀’을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광역 단위 국립정신병원이 일차적으로 진료를 맡되 손이 모자라는 지역에선 대학병원, 민간 병·의원 전문의가 출장 진단 업무를 수행하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기동팀 소속 전문의를 정신병원 취약지로 급파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어두겠다는 계획이다.

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2015년 기준 국내 정신질환 입원 환자 8만1105명 중 강제입원 환자는 5만4998명(67.8%)으로, 그 비율이 프랑스 12.5%, 독일 17.7%, 이탈리아 12.1%, 영국 13.5% 등 선진국보다 훨씬 높다. 독일과 프랑스, 미국 대부분의 주(州)는 법원이 의사의 진단서를 검토하고 환자를 심문한 뒤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영장을 발부하는 방식으로 강제 입원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 과정에서 환자에게 국선 변호사에 해당하는 조력인을 선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신석철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은 “개정법에 찬성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법원이 입원 심사를 맡아 인권침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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