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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의 오늘과 내일]노무현의 운명, 박근혜의 운명

입력 | 2016-11-22 03:00:00


 “국민 여러분께 면목이 없습니다.”

박성원 부국장

 2009년 4월 30일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조사를 받으러 나온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기자들이 “왜 면목이 없다고 말하느냐”고 묻자 “면목 없는 일이죠”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의 비극적 운명도 따지고 보면 오랜 후원자였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의 인연이 화근이 됐다.

 역대 대통령들에게는 대개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물질적 도움을 주었던 대표적 후원자 내지 후견인들이 있었지만, 당선 이후로는 대체로 이권 특혜 논란과 얽힐 것을 우려해 관계를 끊었다.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부르짖어 온 노 전 대통령은 자신도 모르는 새 가족들이 박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를 받게 된 데 따른 수치심을 견디기 어려워 극단적 선택을 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씨를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10월 25일 대국민 사과) 정도로 소개했다. 하지만 최 씨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통령의 ‘왕사(王師·고려시대 왕의 정책스승 역할을 하던 고승)’ 행세를 해 왔음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장차관급 인사 자료를 비롯해 민감한 외교 일정 자료가 줄줄이 최 씨에게 새 나가고 정호성 부속비서관에게는 휴대전화를 통해 ‘(이거) 최 선생님에게 컨펌(confirm·확인)한 것이냐’ ‘빨리 확인을 받으라’는 등의 채근을 했다는 대목에선 말문이 막힌다. 최고의 공적 시스템이 작동해야 할 권력 핵심부에 아무런 권한 없는 ‘강남 아줌마’가 들어와 끼리끼리 해먹는 ‘네포티즘(Nepotism·연고주의)’의 레일을 깔았던 것이다.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올 1월 공기업인 그랜드코리아레저(GKL)에 스포츠팀 선수단을 창단토록 하고 그 업무대행 계약을 최 씨가 실소유주인 더블루케이와 체결토록 주선해 줬다. 2014년에는 최 씨의 딸 정유라가 졸업한 초등학교 학부형이 운영하는 회사 KD코퍼레이션이 제조한 원동기용 흡착제를 현대차에 납품할 수 있도록 중개 역할을 했다. 올해 2월에는 최 씨가 광고 제작 등을 목적으로 세운 플레이그라운드의 회사 소개 자료를 현대차그룹에 전달토록 해 광고를 수주하게 해주고 이 회사가 KT의 광고대행사로 선정되도록 힘을 썼다. 올해 3월에는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을 단독 면담한 자리에서 하남시 체육시설 건립 명목으로 75억 원을 추가 부담토록 팔을 비틀고 최 씨가 K스포츠재단을 통해 70억 원을 받아내게 했다. 오죽했으면 뉴욕타임스는 “박 대통령이 오랜 친구가 기업들로부터 수천만 달러(수백억 원)를 갈취(extort)하는 데 공범(criminal accomplice) 역할을 했다”고 전했겠는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란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에까지 올랐지만, 결국 비극적 운명을 피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는 두 눈을 찔러 세상과 단절했다. 양친을 모두 흉탄에 잃은 뒤 최태민-순실 부녀의 정신적 물질적 보살핌을 받아 가며 세상과는 ‘닫힌 소통’을 해 온 박 대통령이 결국 그 악연 때문에 정상(頂上)의 자리에서 치욕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 자신이 정치를 하게 된 목적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했던 그가 되레 부친의 유산마저 털어먹었다는 불명예를 안게 된 건 오이디푸스만큼이나 비극적이다. 스스로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대통령이 자기반성은커녕 약속했던 검찰 조사마저 거부하는 ‘오기 정치’가 멈추는 날 비로소 국정도 정상화의 물꼬가 트일 것이다.

박성원 부국장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