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후 민영환이 자결하며 명함에 남긴 유서.
‘서울 장안은 초상난 기분이었고 여기저기서 백 명씩 천 명씩 무리지어, 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우리는 어찌 살아가느냐고 부르짖었다. 그 정경이 참담하여 난리를 맞은 때와 같았다. 군대가 순찰하고 비상사태에 대비했는데 군중이 욕하고 야단쳐도 어쩌지 못했다.’
여기서 군대는 일본군이다. 건국 이래 최대의 국정 혼란이었지만 총칼의 위압에 숨죽인 서울에서 물리적 충돌이나 희생자는 나지 않았다. 군중 수십 명이 이완용의 집에 몰려가 불을 지른 것이 눈에 띄는 사건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말의 오고감이었다.
민간 여론의 대표 격으로 20일자 황성신문에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이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한문 제목의 논설을 주필이 썼는데 그 역시 상소들과 유사한 논조였다. 적은 일본인데 조선인끼리 갑론을박 싸우는 양상이었다.
사후약방문 격의 한결같은 내용의 상소가 구호처럼 반복하여 이어졌다. 내일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전망이 없었다.
26일부터 지금의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전현직 정부 고관 수십 명이 연좌농성을 개시했다. 철야로 진행된 그 이례적인 시위에서도 관련자 처벌과 조약의 재협상 이상의 요구는 개진되지 않았다. 며칠에 걸친 그 집단 건의에 대해서 국왕은 ‘이미 다 아는 얘기로 자꾸 번거롭게 하지 마라’는 뜻으로 대응하고 해산을 촉구했다.
궁궐 앞 시위 농성이 무위로 끝난 11월 29일 이토 히로부미는 3주간의 조선 출장을 마치고 국왕의 인사를 받으며 서울을 떠났다. 상소 시위의 선두에 섰던 민영환은 허탈한 심신으로 그날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기 전에 자결했다. ‘나라와 인민의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죽기를 각오하고 노력하지 않는 한 생존하기 힘들 것’이라는 요지의 글을 동포에게 남기고.
그래도 울화와 한탄에는 ‘을사오적’이 약이었다. 그 신조어로써 ‘국정 농단의 매국노’를 형상화할 때마다 다들 면죄부를 받는 느낌이었고 어쩐지 애국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을사오적을 구두선 삼아 지낸 결과는 5년 후의 강제병합이었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