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일록―의병이 된 선비, 임진왜란을 기록하다/정경운 지음/문인채, 문희구 옮김/696쪽·2만3000원·서해문집
“거창 지경에 가면서 보니 사근에서 장곡과 종현에 이르기까지 씨 뿌린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순찰사는 농사를 권하려는 뜻이 없고, 흐트러진 수령들은 오직 술과 고기 먹는 일만 일삼으니….” “왜적 무리가 고성 진해 창원 김해 등지에 가득 차 후추를 심고 보리씨를 뿌리며 도무지 돌아갈 의향이 없으니….”
백성들의 참상이 그대로 전해 온다. 지은이 자신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적에게 딸을 잃었다. “8월 18일 왜적 10여 명이 큰 소리로 부르짖고 칼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쳐들어 왔다. 한꺼번에 달아나던 사람들이 산골짜기에서 넘어져 굴렀다. … (21일) 조카가 산에서 큰딸 정아의 시신을 찾았다. 목이 반 넘게 잘려서 돌 사이에 엎어져 있었다. 차고 있던 장도칼과 손 놓인 것이 모두 살아있을 때와 같이 완연했다. 의복을 모두 잃어버려서 시신 싸는 옷이 매우 허술해 터져 나오는 통곡을 그칠 수가 없구나. 밤에 비가 많이 내렸다.”
저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소금과 고등어 장사를 한다. “어선 여섯 척이 빈 배로 들어왔다. 생선은 손에 넣지 못하고 어촌 나그네가 돼서 주머니만 비어 간다. 인생의 고단함이 여기까지 이르다니.”
전해 오는 임진왜란 기록 대부분이 전란이 끝난 뒤 쓰인 것과 달리 이 책은 경험한 일을 그날그날 적은 것이라 특히 생생하다.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