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최순실 씨 관련 사건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과 염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사과한다”고 지난달 25일에 이어 두 번째 대국민 사과를 했다. 매일 새롭게 터져 나오는 ‘최순실 국정농단’을 박 대통령은 미르·K스포츠재단 강제 모금 단 한 건으로 알고 있는지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 모든 사태는 모두 저의 잘못”이라며 검찰 조사는 물론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울먹이기까지 한 박 대통령의 감정적 호소에 안타깝고 측은하다는 생각을 하는 국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과를 듣다 보면 대기업들로부터 774억 원을 강제 모금해 만든 미르·K스포츠재단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것이고,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비선(秘線) 실세 최 씨가 ‘개인비리’를 저지른 것을 자신은 뒤늦게 알았다는 느낌을 준다. 안종범 전 대통령정책조정수석비서관이 “모든 일은 대통령 지시를 받아서 한 것”이라며 박 대통령과 최 씨 사이에 ‘직거래’가 있다고 밝힌 것을 정면으로 부인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이번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최 씨 사태의 본질은 ‘대통령에 의한 비선 실세의 국가권력 사유화’다. 국민은 박 대통령에게 주권을 위임했는데 박 대통령은 선출되지도, 검증되지도 않은 일개 사인(私人) 최 씨에게 연설문 수정부터 문화체육·인사·국방·외교·교육 정책까지 전방위 국정 개입을 허용하고 비호했기에 국민이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최 씨에게 ‘대통령 권력’을 넘긴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초유의 헌법 위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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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같은 진정성 없는 재탕 사과로 등 돌린 민심이 다시 돌아설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5%(4일 한국갤럽 발표)로 추락해 사실상 국정 운영이 어려울 정도다.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금융 주권을 내줬던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 마지막 해 4분기 때의 6%보다도 낮은 역대 최저다. 오늘 서울 광화문광장 등 전국에서 대규모로 열리는 촛불집회에서 국민의 거센 분노가 분출될 개연성도 크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을 강조했던 정치인이 박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의 권위와 도덕성, 정당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에 국민은 박 대통령에게 더는 국정을 맡길 수 없어 책임총리나 거국중립내각을 요구한 것이다. 그제 김병준 총리 후보자는 자신은 내치(內治), 박 대통령은 외치(外治)를 맡기로 이야기가 됐다며 책임총리로서 사실상 거국내각을 구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박 대통령이 어제 담화에서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이 김 후보자를 통해 국정의 동력을 회복할 생각이라면 대국민 담화에서 직접 인사 배경을 설명하고 김 후보자가 밝힌 내용을 확인해 줬어야 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박 대통령의 2선 후퇴를 요구하는 주장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데도 박 대통령은 안보·경제 위기를 들어 “국민들께서 맡겨주신 책임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며 박 대통령 자신이 국정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점이다.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은 어제 국회에서 박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떼고 2선으로 물러나는 방안에 대해 “나로서는 그런 건의를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김 후보자가 6·29선언을 했는데 박 대통령은 오히려 4·13 호헌(護憲)선언으로 국민의 여망을 역행한 것과 같은 형국이다. 박 대통령이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대통령 권한을 내려놓지 않으면 민심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