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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숨길 수 없는 이름

입력 | 2016-08-24 03:00:00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백이와 도잠이 죽고 죽지 않은 것은, 그 길은 달랐으나 그 의로움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伯夷陶潛死不死殊塗, 而其義則無不同). 죽은 것이 의롭다고 한다면 도잠이 없을 것이요, 죽지 않은 것이 의롭다고 한다면 백이가 없을 것이다. 그 의로움이 다르지 않다면 죽은 자는 모두 백이일 것이요 죽지 않은 자는 모두 도잠일 것이니, 이 두 입장에 대해서 내가 어찌 시비할 수 있으리오?



조선 말기 의병장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1846∼1916) 선생이 지은 ‘후잠설(後潛說)’입니다. 백이는 옳지 않은 세상에 항거하여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는 성인이고, 도잠은 옳지 않은 세상이 싫어 관직에서 물러나 평생 은거한 도연명(陶淵明)입니다. ‘후잠설’은 도잠을 본받아 자신의 호를 ‘훗날의 도잠(後潛)’이라고 짓고 숨어 산 사람에 대한 글입니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어떤 태도로 적들과 맞설 것인가가 글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노년의 몸으로 무기를 들고 온몸으로 적과 맞서 싸우신 선생께서 “나가 싸우자”고 하시는 게 아니라 “죽는 것도 옳고 안 죽는 것도 옳다”고 하십니다. 죽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올바른 선택을 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무리에 후잠이라는 호를 쓰는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가 망하던 날 백이처럼 죽은 사람도 있고 도잠처럼 죽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죽지 않은 도잠 중 한 사람이 후잠이다. 도잠의 뒤에 태어났으나 그 잠(潛·숨음)을 함께하고자 후잠이라고 하였으니, 선잠과 후잠이 택한 길은 같다.

만약 그 이름을 거론한다면 그가 숨으려는 본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 처사 도잠도 지금까지 숨지 못하였다. 후잠이 비록 이름을 숨기려고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조선 처사 이태로(李泰魯)라는 이름을 숨기지는 못하리라.



도잠이 잠(潛)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살고자 하였으나 후세에 명성을 남겼듯이, 후잠이라는 호를 쓴 처사 이태로도 끝내 세상에 드러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름이 그만큼 무섭다는 엄숙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안팎으로 나라가 어려운 시기,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은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