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건 편견-의도를 버리고 성실하게 관찰하는 것 정치도 학문도 산업도 새로워지는 일을 감행하려면 우선 보아야 한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
궁금증이 생겼다. 왜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말을 “I look at you”라 하지 않고 “I see you”라고 했을까. 나처럼 영어 실력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나 가질 법한 궁금증이다. ‘look’은 의도를 가지고 목표물을 응시하는 행위다. 이와 달리 ‘see’는 그냥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see’는 ‘look’에 비해서 보는 사람의 주관적 편견이나 의도가 많이 제거되어 더 전면적이고 개방적이다. 한자 문화권의 언어 습관에서 보면 ‘look’은 ‘시(視)’에 해당되고, ‘see’는 ‘견(見)’에 해당된다.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인격적인 표현이 영어로는 ‘see you’이고, 중국어로는 ‘再見’임은 당연하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인격적인 개방성과 전면성을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저 피상적인 대면 이외에 무엇이 되겠는가. ‘look’과 ‘시(視)’는 어쩔 수 없이 주관의 폐쇄적 편견과 가치 기준 그리고 일방적인 신념을 허용하게 된다. 그래서 넓고 높은 인격들은 ‘see’와 ‘견(見)’의 보기를 한다.
해안가를 달리다 보면 저 멀리 있는 섬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그 섬을 본다고 하지만 진짜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개는 이미 자신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섬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토대로 해서 판단해 버리고 만다. 시선을 그 섬에 직접 접촉시키거나 붙이지 못하고 중간에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이래서 보는 일은 인간으로서 상당한 내공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본다’고 하려면 개방된 인격을 가지고 대상에 대하여 전면적이고 성실한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접촉한 다음에는 오랫동안 시선을 거기에 머무르게 한다. 이것을 관찰이라고 한다. 관찰하고 또 관찰하면 어느 순간 보는 사람이나 보이는 대상이 구태를 벗고 함께 허물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전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대상을 통하여 내가 새로워지고, 대상 또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존재성을 보여준다. 이 신기한 절차와 결과가 문자를 매개로 정련되어 남겨지면, 우리는 그것을 ‘시(詩)’라고 부른다. 그래서 시인은 원초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정치가 되었건, 학문이 되었건, 예술이 되었건, 산업이 되었건 새로워지는 일을 감행하려면 우선 보아야 한다.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지배하고 있는 구태의연한 의식으로 채워진 자신이 허물어질 필요가 있다. 이것을 어느 부류의 수양론에서는 ‘허심(虛心)’이라고도 하고 ‘무심(無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새로운 일은 결국 새로워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새로워진 사람은 볼 수 있고, 볼 수 있으면 새로워진다. 보는 능력이 없이도 지배력을 가질 수 있을까.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