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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서도 아찔한 폭주… 속도만 줄여도 사상자 27% 감소

입력 | 2016-03-17 03:00:00

[교통사고 사망자 2000명 줄이자]<4>도심 제한속도 10km 낮추자
운전 ‘편의’보다 보행 ‘안전’을




《 한국의 운전자들은 보행자와 도로를 함께 쓰는 데 인색하다. 심지어 도로 위에선 보행자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운전자도 많다. 다른 국가에 비해 ‘도로는 차량을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유달리 강한 탓이다. 그래서 운전자들은 차량 흐름에 약간의 여유만 생겨도 가속페달을 힘껏 밟는다. 하지만 속도를 높일수록 운전자의 시야각은 좁아지고 제동거리는 늘어난다. 사고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속도를 낮추면 그만큼 사고 위험도 줄어든다. 하지만 현행 도로의 제한속도 기준은 철저히 운전자 편이다. 한국처럼 도심 주요 도로를 시속 80km, 이면도로를 60km로 달릴 수 있는 교통 선진국은 없다. 도심 제한속도를 현행보다 낮춰야 하는 이유다. 》

50, 65, 78…. 속도계 눈금이 거침없이 올라갔다. ‘시속 91km.’ 두 눈을 의심했다. 15일 오전 11시 서울 구로구 디지털단지 오거리. 기자가 탄 택시는 시속 100km에 육박하는 속도로 구로고가차도를 지났다. ‘달린다’보다 ‘날아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이 도로의 제한속도는 시속 60km. 도로 곳곳에 ‘사고 다발 지역’ 표지가 있었지만 택시운전사 함모 씨(61)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고가차도 진입 후에는 단속 카메라가 없어서 괜찮다”며 오히려 기자를 안심시켰다.

고가도로 끝부분에 이르자 약 60m 앞에 횡단보도가 보였다. 그때서야 택시는 속도를 줄였다. 횡단보도에 앞바퀴를 걸치고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옆 차로를 달리던 화물차는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지나쳤다. 고령의 보행자들은 아슬아슬하게 길을 건넜다. 도로 옆으로 노인요양병원 두 곳이 보였다. 노인과 장애인 등 ‘교통 약자’가 많아 보행자의 사고 위험이 큰 곳이다. 하지만 낡은 중앙분리대 외에 보행자의 생명을 구할 안전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왕복 8차선 도로로는 드물게 시속 60km로 제한속도를 낮춰 그나마 나아진 것”이라며 “운전자의 과속 습관을 고치려면 제한속도를 낮춰 주행속도를 떨어뜨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과속·신호위반이 만든 ‘악마의 도로’

취재진은 서울에서 보행자 안전이 가장 취약한 지역을 찾아 그 원인을 분석했다. 대상은 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 분석 시스템에 등록된 ‘무단횡단 사고 다발 지역’. 무단횡단 사고가 잦은 곳은 보행자 사고 확률이 높은 ‘보행환경 취약 구간’이다.

구로고가차도 주변 도로에서는 2012년부터 3년간 18건의 보행자 사고가 발생해 2명이 숨지고 13명이 크게 다쳤다. 보행자가 ‘무단횡단’이라는 1차 원인을 제공했지만 운전자의 ‘과속’이라는 2차 원인이 없었다면 피해가 줄어들었거나 아예 사고 발생을 막을 수도 있었다.

고가차도 아래 도로 역시 아수라장이었다.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 꼬리를 문 차량들이 도로를 점령했다. 신호는 있으나 마나였다. 관찰 30분 만에 차량 28대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지났다. 차량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오토바이는 보행자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좁은 보도 폭도 문제였다. 일부 구간은 폭이 1m도 안 돼 보행자들이 차도로 내려오기 일쑤였다. 그나마 넓은 보도는 상점 입간판이나 배달 오토바이들이 차지했다. 주민 현모 씨(68·여)는 “이렇게 차도와 보도가 좁은데 차량들은 신경도 안 쓰고 쌩쌩 달린다. 언제 치일지 몰라 늘 불안하다”고 말했다.

같은 기간 경기 용인시 처인구 용인버스터미널 주변에서도 보행자 사고 17건이 발생했다. 제한속도 시속 60km를 지키는 차량을 찾기 힘들었다. 아찔한 순간도 자주 연출됐다. 고가차도 아래로 건너는 보행자를 미처 보지 못한 덤프트럭들이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렸다. 무단횡단 보행자도 15분 동안 18명이나 됐다. 1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왼쪽 다리가 불편한 이성환 씨(80)는 “물리치료를 받으러 매일 이곳을 지나는데 과속 차량 때문에 길을 건너기 두렵다”고 말했다.

○ 제한속도 낮추자 인명피해 3분의 1 감소

한국의 보행환경은 낙제점에 가깝다. 지난해 발생한 교통사고 사망자 4621명 중 1795명(38.8%)이 보행자다. 인구 10만 명당 보행자 사망은 3.9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1.2명의 3배가 넘는다.

보행자들의 체감도도 비슷했다. 본보가 성인 남녀 27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80.1%가 ‘보행환경이 위험하다’고 답했다. 45.5%는 보행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로 ‘과속’을 꼽았다. 보행자 사고 위험이 가장 큰 곳으로는 절반 이상이 보도와 차도 구분이 없는 좁은 골목길(53.4%)이라고 답했다. 보행자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불법 주정차 단속 강화(36.1%)와 제한속도 하향 조정(32.5%)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보행자 사고를 줄이려면 하루빨리 도심 제한속도를 낮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 교통 선진국 대부분은 도심 제한속도를 시속 50km 이하로 낮췄다. 시속 10km 차이가 보행자의 생사를 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의 주행실험 결과 시속 60km, 70km로 달릴 때 보행자의 사망 확률은 50km로 달릴 때보다 각각 1.8배, 2.1배로 높아졌다.

감속 정책의 효과는 국내에서도 이미 확인됐다. 경찰청이 2014년 제한속도를 시속 10∼30km 낮춘 134개 지역의 교통안전도 개선 효과를 분석한 결과 사고는 18.3%(123건), 사상자는 26.7%(180명)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송파구 가락로는 제한속도를 시속 60km에서 40km로 낮춘 뒤 인명피해가 43.9%(25명)나 줄었다.

감속 효과는 사고 감소로만 그치지 않는다. 제한속도를 낮추자 실제 주행속도가 시속 3.5km 줄었다. 제한속도 준수율은 개선 전 76.9%에서 시행 후 97.7%로 높아졌다. 운전자들에게 ‘천천히 달려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설재훈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사고 다발 구역의 제한속도를 10km만 낮춰도 교통사고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운전자의 ‘편의’를 보행자의 ‘안전’보다 우선시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박성민 min@donga.com / 용인=정성택 기자

※ 공동기획 : 국민안전처 국토교통부 경찰청 교통안전공단 손해보험협회 한국교통연구원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tbs교통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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