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때기 물린뒤 술 퍼붓고… 장기자랑 해봐라”
서울의 한 사립대에 합격한 새내기 이모 씨(18·여)는 최근 학교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익명의 글을 보고 기겁했다. 모 학과의 ‘새터’(새내기 새로 배움터의 줄임말·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페트병 윗부분을 자른 뒤 입구를 신입생의 입에 물리고 소주와 물을 섞어 붓는 전통이 있다는 글이었다. ‘고통스러워 뿜어내는 아이들도 부지기수다’ ‘나도 처음 할 때 말도 못할 압박감에 벌벌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는 글이 이어졌다.
해당 글은 교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과(科)일까 봐 무섭다’ ‘자칫하면 사고가 날 수 있다’ 등 우려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일부 학생은 ‘술을 거의 섞지 않고 물만 준다’ ‘이것도 하나의 추억’이라고 반박했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 학생은 ‘우리 과에는 냉장고 채소 칸에 술과 음료를 섞어 부은 뒤 돌아가며 마시는 전통이 있다’는 ‘추가 제보’를 올리기도 했다. 결국 해당 학과는 올해부터 일명 ‘깔때기’를 폐지하기로 했다. 이 학과 부학생회장은 “새터는 신입생들이 대학에 발 디딘 것을 축하해주는 행사이기 때문에 공포감을 제거한 순수한 추억만을 선물해주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입생들에게 새터는 여전히 공포의 장이다. 뿌리 깊은 음주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술 없는 새터를 만들어 보자는 움직임에 선배들은 “그러면 밤새 머리 맞대고 토론이나 하다 자라는 것이냐”며 불만을 나타낸다. 2학년이 되는 최모 씨(20)는 “지난해 새터를 마친 뒤에는 동기들이 ‘우리 내년에는 억지로 술 먹이지 말자’고 하더니 막상 후배들을 맞게 되자 ‘우리도 마셨으니 신입생들도 마셔야 한다’는 식으로 바뀌어 답답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내기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한 신입생은 “아무리 강요하지 않는다 해도 막상 술을 안 마시면 분위기를 해칠 것 같다”고 걱정했다. 또 다른 신입생 한모 씨(20·여)는 “몸이 안 좋아 술을 못 마시는데 처음 보는 선배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기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대학 사회 내부에선 신입생들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술 없이도 어색한 사이를 극복할 수 있는 ‘관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자성도 나온다. 하종은 카프성모병원 알코올치료센터장은 “뇌를 마비시키는 술의 강력하고 인위적인 기능에 길들면 건강한 의사소통 문화를 만들 수 없다”며 “술을 마시지 않고도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술 외에 새터에서 ‘장기자랑’을 강요하는 것 역시 신입생들에겐 큰 고민거리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대 문과대가 2016년도 신입생 173명을 대상으로 ‘새터에서 가장 무서운 것’에 대해 물은 결과 술에 이어 장기자랑이 2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