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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산 고슴도치에서 핵 ‘가시’ 뽑기

입력 | 2016-01-14 03:00:00


주성하 기자

북한 TV에서 최고 인기 만화 시리즈는 ‘소년장수’, ‘다람이와 고슴도치’이다. 이 만화가 방송될 때는 거리에서 아이고 어른이고 찾아보기 힘들다.

‘소년장수’는 고구려시대 소년장수 ‘쇠메’가 외적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으로, 1997년에 50부로 끝났다. 그런데 재작년 김정은이 100부작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려 현재 58부까지 나왔다. 오랜만에 나타난 쇠메는 청년으로 성장해 콧수염까지 길렀다. 적이 벌벌 떠는 용감한 청년 장수인데, 인민의 눈에 그 주인공의 모습으로 비치길 바라는 김정은의 욕망이 담긴 만화다.

‘다람이와 고슴도치’는 다람쥐와 고슴도치 동맹군이 꽃동산(북한)을 노리는 적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이들의 적은 승냥이 족제비 들쥐 부대인데 각각 미국 일본 한국을 의인화한 것이다. 우두머리 승냥이는 근육질 몸매에 사납고 힘도 세지만 머리가 나쁘다. 족제비는 교활하고 끈질기다. 들쥐는 승냥이와 족제비의 앞잡이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꽃동산 정찰 임무를 도맡고, 전공도 제일 많이 세우고 아이디어도 많다.

꽃동산에는 마을을 지켜준다고 큰소리치던 힘 센 곰도 살았지만, 술주정뱅이 곰은 들쥐 공작원이 머리 조아리며 건넨 독주를 먹고 그만 죽어버렸다. 이 곰은 소련인 듯하다.

다람이와 고슴도치는 만화의 형식을 빌린 인민 세뇌 시리즈이다. 실제 북한 당국은 자신들을 고슴도치에 비유하고 있다. 전국에 온통 땅굴을 파놓은 것도 고슴도치의 습성과 닮아 있다.

내 머릿속에도 김일성대 시절 들었던 중앙당 강연과장의 강연이 생생히 남아 있다.

“동산에 살찌고 맛있는 짐승이 널렸는데, 하필이면 호랑이가 가시 세운 고슴도치를 잡아먹으려 하겠냐.”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고슴도치가 1990년대 중반 영양실조에 걸려 죽다 살아났다. 가시도 다 빠지고 힘도 없어졌다. 그래서 새로 비장의 무기로 ‘핵’ 가시를 준비하고 있다. 잔가시는 다 버려도 치명적 가시 몇 개는 갖겠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고슴도치의 생존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적이 나타나면 가시를 세우고 몸을 웅크릴 뿐인데 호랑이도, 곰도 피한다. 과거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외투를 벗기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외투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가시 껍질이었던 셈이다.

이제 와서 북한의 핵을 폐기시키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북한이 원자탄을 수백 개씩 만들 것도 아니다. 핵보유국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선 10개쯤이면 되고, 많아봐야 수십 개면 충분하다. 이 정도 목표는 몇 년 뒤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실험 후 남한은 대북 확성기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북한이 이것 때문에 핵을 폐기할 리는 만무하다. 더구나 겨울은 북풍의 계절이라 대북 전단(삐라)을 뿌리는 사람들도 집에서 쉰다. 확성기 소리가 된바람을 거스르며, 북한의 맞불 방송 소음까지 누르며 당국의 설명대로 낮에 10km, 밤에 24km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북핵 폐기 목표는 화가 잔뜩 난 고슴도치의 등에서 치명적 가시를 뽑아버리겠다고 나선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굴에 몰아넣고 통로를 막는 것이 효과적 전략인 듯 여겼지만, 문제는 고슴도치가 굴에 비상구를 아주 많이 만들어 놓는다는 점이다. 통로 하나를 막으면 금방 우회 통로를 뚫어버린다.

더 근본적 문제는 산 채로 고슴도치 가시를 뽑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굴에 깊이 숨은 고슴도치의 가시는 뽑을 수도 없다. 굴 밖으로 끌어내야 가시를 뽑든 잡든 할 것 아닌가.

고슴도치에서 기름과 비계를 얻는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이 정글에서 고슴도치를 잡는 방법은 간단하다. 굴 앞을 지키다가 바나나 송이를 던지면 된다. 무거운 바나나가 가시에 박힌 고슴도치는 움직이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그 가시 때문에 붙잡혀 죽는다.

고슴도치를 자처하는 북한의 핵 가시 위에는 어떤 바나나를 던져야 할까.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몇 달 동안 성층권에 머무를 수 있는 기구나 태양광 드론을 띄워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민간 소속의 기구가 평양 상공 성층권에서 인터넷과 방송 전파를 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북한 주민 머리 위에서 외부 정보가 폭포처럼 쏟아진다면 폐쇄된 북한도 굴 안에서 오래 버티긴 어려울 것 같다.

북한의 핵개발 역사는 30년이 넘는다. 이 긴 역사를 몇 년 만에 무효화시키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핵 폐기 정책도 길게 보고 다시 짜야 한다. 고슴도치를 살려두고 가시만 뽑을 것이냐, 공격성을 없애버릴 것이냐, 굴에 가둘 것이냐, 밖으로 끌어낼 것이냐. 결국 선택의 문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