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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박제균]丙申年 모독

입력 | 2015-12-24 03:00:00


사석에서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처음 만나본 사람은 놀란다. 온화하고 단정한 신사의 느낌이다. 가끔 지각하는 걸 빼곤 매너도 수준급이라고들 한다. 지난달 6일 열린 국정화 반대 집회에선 피아노까지 연주했다. ‘어라, 막말의 달인이 피아노를….’ 하지만 이종걸은 예원학교 피아노과 출신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답게 요즘 정치인치곤 드물게 르네상스적 감수성을 갖췄다.

▷그런 그가 마이크 앞에만 서면, SNS 자판에 손만 올리면 돌변한다. 아무래도 이종걸 막말의 ‘끝판왕’은 ‘박근혜 그년’ 사건이다. 오죽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인상도 좋으시고 말씀도 잘하시는데 왜 저보고 ‘그년’ ‘저년’ 하셨어요?”라고 대놓고 무안을 주었을까. 그 자리에선 바로 사과했던 이종걸이 22일 또 박 대통령을 비난하며 “국민이 병신이냐, 바보냐”고 막말했다. 그런데 이번 ‘국민 병신’ 발언은 단순한 막말 같지가 않다.

▷되도 않는 ‘민중총궐기’란 이름의 19일 3차 집회 때 ‘병신년 박근혜’란 구호가 등장했다. 지금 SNS에선 박 대통령과 새해를 조합한 ‘박근혜 병신년 지지율’ ‘박근혜 병신년 연하장’ 따위의 악성 조어들이 돌고 있다. ‘병신(病身)’은 ‘바보’라는 말과는 또 다르다. 장애인을 극도로 비하한 단어여서 정치인에겐 금기어나 마찬가지. 이종걸이 사실상 금기어를 입에 올린 걸 어떻게 봐야 할까. 벌써부터 새해의 60간지(干支) 이름인 ‘병신(丙申)년’이 각종 악성 저질 패러디에 쓰일 거란 우려가 나온다.

▷천간(天干)의 병(丙)은 씨앗이 줄기를 뻗는 모습이고, 붉은색을 띤다. 지지(地支)의 신(申)은 원숭이다. 즉 병신년은 ‘붉은 원숭이가 뻗어나간다’는 좋은 뜻을 담고 있다. 예로부터 원숭이는 지혜와 사교성의 상징이 아닌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해(936년)도, 팔만대장경 제작이 시작된 해도 병신년(1236년)이다. 추락이냐, 비상(飛上)이냐의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 국운을 널리 뻗어도 시원찮을 새해를 ‘병신년∼’이나 읊조리며 지저분하게 맞을 수는 없다.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