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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만난 사람/권순활]“국내서 싸우지 말고 세계를 승부처 삼아 미래 개척하라”

입력 | 2015-12-21 03:00:00

김석동 前 금융위원장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한국 경제의 위기 국면에서 수습 책임을 자주 맡아 ‘대책반장’ ‘해결사’란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당국은 시장에 개입할 시점과 퇴장할 시점을 잘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62)은 요즘 유라시아 기마 유목민족사에 푹 빠져 있다. 이번 인터뷰를 위해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지평인문사회연구소에서 만났을 때도 자신을 ‘역사학도’라고 표현했다. 얼마 전 전직 관료로서의 전공인 ‘경제’와 최근 관심사인 ‘역사’를 접목한 ‘김석동의 대한민국 경제와 한민족 DNA’라는 책을 비매품으로 발간했다. 김 전 위원장은 한국 경제가 걸어온 길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도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공직을 떠난 사람이 훈수를 두고 싶지 않다”며 말을 아꼈다. 》

―재정경제부 1차관과 장관급인 금융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 출신이 역사에 관심을 쏟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역사, 특히 북방사는 학창 시절부터 관심이 컸던 분야다. 북방 민족 역사는 우리 고대사와 긴밀히 연결되는 부분이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나 삶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핵심적인 분야다. 한민족 DNA의 원류는 북방사를 배제하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번에 출간한 책에서 “대한민국 현대경제사는 과거 기마민족 대제국과 같은 기적의 드라마”라고 강조했는데….


“한국은 국토 면적이 세계 109위, 인구가 26위에 불과한 작은 반도 국가다. 제국주의의 강점과 분단, 전쟁도 겪었다. 이런 나라가 반세기 만에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적 산업국가와 민주국가로 변모하면서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1960∼2014년 세계경제 규모가 7.3배로 늘어나는 동안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37.6배로 증가했다. 기마민족들이 만들어 낸 대제국에 비견할 만한 기적의 드라마다.”

한민족 DNA가 경제 기적 ‘최종 열쇠’

그는 한국의 경제 기적을 가능케 한 원동력으로 해외에서 승부를 본 전략의 성공을 중시한다. 특히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던 기마민족이나 초원 제국 전사(戰士)들의 DNA를 공유한 한국인의 DNA가 ‘기적의 최종 열쇠’라는 점을 역설했다.

“기적을 만들어 낸 한민족의 DNA로 네 가지를 꼽고 싶다.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장경제를 빠르게 체득한 승부사 기질,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면 된다’는 끈질긴 생존 본능, 리더를 중심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강한 집단 의지, 세계를 무대로 승부하는 개척자 근성이다. 특히 한민족 DNA의 원류인 기마민족사를 보면 뛰어난 리더가 나타나면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한국은 경제 기적을 만들어 낸 박정희 시대가 비슷한 면이 있다.”

―현실 경제 이야기를 좀 해보자. 현재 한국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나.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는 아직 방향을 잡지 못했고 세계경제의 불안정성도 해소되지 않았다. 세계경제가 소용돌이치는 상황에서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어려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게다가 한국 경제는 인구와 자본스톡 문제로 잠재성장률이 떨어진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나가야 하기 때문에 이중고를 겪고 있다.”

―난국을 타개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폭풍우가 칠 때 나가 돌아다니면 몸만 망가진다. 집에서 비바람을 피해야 한다. 먼저 집을 튼튼히 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초, 지붕, 창틀을 다 점검하고 먹거리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폭풍우가 지나갈 동안 그냥 빈둥거려서는 안 되며 힘써 체력을 보강해 둬야 한다. 폭풍우가 지나가고 날이 개면 달릴 수 있는 힘을 그때 비축할 필요가 있다.”

―경제 체력을 키우는 방법은….

“세계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통화, 환율, 재정이라는 전통적인 3대 정책을 구사해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는 모두 한계가 있다. 금리는 높이기도, 낮추기도 어렵고 환율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재정도 적자 문제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전통적인 매크로 정책으로 대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딴 칼을 활용해야 한다. 상상력을 동원한 규제 혁파를 통해 민간의 활기찬 투자를 유도하고, 부실과 위험을 과감히 정리하는 구조 개혁을 통해 경제의 체력을 단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차기 경제부총리와 정치권, 기업, 노동계 등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들에 조언한다면….

“구체적인 정책보다는 원칙적인 이야기만 하겠다. 맨주먹으로 일으킨 대한민국의 미래는 사람에게 달린 만큼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게 자리를 줘야 한다. 한민족의 성장 DNA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려면 신뢰받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구성원들의 강한 결집력을 끌어내야 한다. 한국은 특히 리더십이 중요하다. 어떤 조직이든 리더부터 잘해야 한다. 꼭 대통령이 아니라도 학자나 기업인, 언론인이 나라를 바꾸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미래는 세계에 있다. 국내에서 백날 싸워 봐야 날만 샌다. 열린 세계를 승부처로 삼고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결집력 이끌어 내는 리더십이 중요

―금융 정책을 다뤄 본 경험이 많은데 금융 개혁은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나.

“마켓(시장)과 인더스트리(산업)가 제 역할을 하도록 둬야 한다. 마켓의 핵심은 가격과 투명성이다. 자유롭게 시장가격이 형성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시장 왜곡이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해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인더스트리의 핵심은 경쟁력과 건전성이다. 새로운 금융상품과 기법이 폭발적으로 도입될 수 있도록 규제를 풀면서,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체제를 정비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경쟁력이고 무엇이 건전성인지 구분하는 것이다. 당국이 똑똑하면 경쟁력과 건전성을 제대로 구분하지만 무식하면 그 경계를 잘 모른다.”

김 전 위원장은 ‘대책반장’ ‘해결사’란 별명을 갖고 있다. 1993년 금융실명제 전격 발표 직후의 충격을 수습하는 실무 책임을 맡은 것을 비롯해 1995년 부동산실명제, 1999년 대우채(債)사태, 2003년 카드대란(大亂) 수습, 2006년 8·31부동산대책 같은 굵직굵직한 정책 결정 때마다 자리에 관계없이 차출돼 위기수습책을 마련했다. 예정된 해외 유학과 해외 근무가 취소돼 현장에 투입되기도 했다. 필자는 그의 상사였던 전직 고위 경제 관료들로부터 “어려움이 터지면 김석동이 떠올랐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위기 국면에 대응할 때 윗사람들은 믿고 맡겨줬고 부하들은 따라줬다. 위기 때 내가 일하는 방식은 평시와 다르다. 부서를 불문하고 같이 일할 최고의 인력을 먼저 차출해 팀을 짠다. 그 다음에는 외부 전문가를 활용해 사태의 본질을 최단시간에 파악한다. 그리고 대책을 마련하는데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동안 해오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기존의 통상적인 방법으로 안 되니까 대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신속하게 조치하되 환부를 철저히 들어내는 대안을 택한다. 그래야 시장 충격의 파장을 최소화하고 나중에 재발하지 않는다.”

그는 2011년 1월 금융위원장 취임 2주일 만에 삼화저축은행을 시작으로 부실 저축은행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한 달 뒤에는 부실이 가장 심각했던 부산저축은행을 정리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저축은행 문제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경제의 치명적 암적 존재가 됐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물어봤다.

“2008년 2월 재경부 1차관에서 물러난 뒤 3년간 ‘야인 생활’을 하다 공직에 복귀했다. 금융위원장에 취임해 첫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저축은행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바로 정리하겠다고 결심했다. 사전에 외부와 협의하면 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어 청와대에도 사전 보고하지 않았다. 청와대에는 1월 14일 임시 금융위원회를 소집하기 30분 전에 백용호 정책실장에게 전화로 ‘오늘부터 저축은행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이 문제는 내가 전적인 책임을 지고 하겠다’고 알려줬다. 1년간 저축은행 총자산의 46%를 정리했다. 물론 그냥 놔두고 몇 달 더 끌 순 있었겠지만 그랬으면 후유증이 더 커졌을 것이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발언으로 관치주의자라는 비판도 받았는데….

“2003년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1국장 시절 ‘카드대란’을 수습하라는 지시를 받고 대책을 마련해 발표했다. 은행연합회에서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하고 절박한 상황을 기자들에게 설명했는데 취재 경력이 짧은 젊은 기자가 따라와서 ‘그건 관치가 아니냐’라고 하길래 ‘이렇게 자세히 설명했는데도 모르나’ 싶어 ‘官은 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답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나왔다. 금융위원장 때도 금리와 수수료, 월급에는 당국이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 관치주의자란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어쨌든 기자에게 그 말을 한 내가 잘못이지만….(웃음)”

당국, 시장 개입-퇴장 시점 잘 알아야

―그럼 정부 당국의 시장개입은 어느 선에서 이뤄지는 것이 적절한가.

“당국은 플레이 그라운드를 만들고 룰을 정해서 게임이 재미있게 이뤄지도록 하는 심판이지 직접 선수로 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라운드가 깨지고 룰이 지켜지지 않으면 나서야 한다. 시장이 작동하지 않고 스스로 회복될 수 없다고 판단하면 즉시 개입해 신속하고 과감하게 사태를 정리해 시장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사태가 정리되면 즉시 다시 퇴장해야 한다. 시장 붕괴라는 위기가 아닐 때 들어가면 안 되고, 위기 때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타이밍을 늦춰서도 안 된다.”

김 전 위원장은 대학 시절 공무원 생각은 꿈도 꾼 적이 없어 졸업 후 삼성물산에 들어갔다가 나와 조그만 무역회사를 차린 적도 있다. 1979년 뒤늦게 행정고시 23회에 합격한 뒤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재정경제원 외화자금과장이던 1997년 터진 외환위기 후 번진 ‘희생양 찾기’에 회의를 느껴 사표를 내려고 마음먹었다. 대학 4학년 때 결혼한 부인이 “당신은 공무원으로 일할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무 때나 그만둬도 되니 한번은 더 생각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그때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마음으로 공직에 남아 경제 관료로서 내 나름대로 뚜렷한 족적과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평을 듣는다.

―요즘 공직자들의 경쟁력과 사명감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가는 적당히 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공직자들은 시스템의 수호자다. 그래서 공직은 아무나 해선 안 되는 직업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익(私益)에 기초해 움직이지만 제대로 된 공직자는 공익(公益)을 위해 일한다. 현직에 있을 때도 후배들에게 자주 말했지만 나라의 미래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와 자기희생의 각오가 없으면 공직에 연연해선 안 된다.”

대표집필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권순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