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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YS의 운때, 직감, 용기

입력 | 2015-11-25 03:00:00

YS가 주도한 2·12총선 돌풍, 전두환 정부의 금기선 깨고 6월 항쟁의 발판 마련
그와 맞서던 정치인, 모두 거꾸러뜨린 정세 판단의 천재




황호택 논설주간

한국 현대사에서 1987년 6·29항쟁이 민주화를 가져왔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장마철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던 흙담을 발로 걷어차 버린 것과 같았다. 전두환 정권이 임기 말로 치닫는 정국에서 민주화 열기는 민심의 바닥에 휘발유처럼 깔려 있었고 여기에 박종철 군의 죽음이 성냥불을 댕겼다.

1972년 유신체제로부터 1987년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는 15년 동안 암흑기를 맞았다. 1980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같은 봄이 왔으나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언론은 다시 침묵을 강요받았고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체제가 이어졌다. 침묵의 두꺼운 얼음장을 깬 것은 1985년 2·12총선이었다.

그 전해 결성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내부에서도 군부독재를 정당화시켜 준다는 이유로 2·12총선 참여 반대론이 강했다. 그러나 김영삼(YS) 대통령은 동교동계의 대리인 역할을 하던 김상현 전 의원과 함께 총선 참여의 결단을 내렸다.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DJ) 대통령은 민추협 결성이나 신민당 창당, 총선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총선 나흘 전 DJ가 전두환 정부의 구속 위협을 불사하고 귀국을 감행하면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감각에서는 DJ보다 YS가 한 수 위일 때가 많았다. DJ는 귀국 후 연금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에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간 것도 YS였다.

나는 2·12총선 때 취재기자로 서울 종로·중구의 이종찬(민정당) 이민우(신민당) 정대철 후보(민한당)의 유세장에 가봤다. 인파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민우 후보가 전두환 씨의 집권 과정과 친인척 비리 등을 질타할 때마다 우레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민정당 후보의 연설에서는 야유가 지지 구호를 압도했다.

당시 정권은 의원의 대정부질의 원고도 사전검열을 하다시피 하고 민감한 신문 기사의 제목과 기사의 크기까지 간섭했다. 2·12총선은 전두환 군부정권이 설정해 놓은 금기선을 모두 무너뜨렸다. 서대문·은평 선거구에서 신민당 김재광 후보(1922∼1993·8선 의원)는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고 피로 권력을 탈취한 자들은 단두대(斷頭臺)에 올려놓고 ×을 쳐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당국은 과격한 발언을 하는 후보들에 대해 사법처단을 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신민당 후보들을 잡아들였다가는 선거판이 뒤집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에서였던지 실제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때까지 제1야당이던 민한당은 창당 때부터 신군부의 입김이 작용했고 ‘민정당 2중대’라는 외피를 종내 벗지 못했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2·12총선 참여의 결단을 내려 신민당을 창당해 관제정당을 깨고 민주화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YS의 공이 누구보다도 컸다고 할 수 있다.

YS는 직감과 용기의 정치인이었다. 운때도 잘 맞아 그를 압박하거나 그와 맞섰던 사람은 하나같이 고꾸라졌다. 그의 의원직을 박탈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YS 제명의 후과(後果)로 부마항쟁과 궁정동의 비극을 맞았다. 그는 1980년 탱크로 서울의 봄을 밀어버리고 자신을 탄압한 전두환 노태우를 교도소에 보냈다. YS는 이회창을 국무총리로 발탁해 키웠으나 대통령 후보가 된 뒤 자신에게 대들자 이인제의 탈당을 붙잡지 않고 DJ 비자금 수사도 유보시켜 DJ 당선을 거들었다.

YS였기에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법처리도 가능했다고 본다. 박계동 의원이 국회 연설을 통해 천문학적 비자금의 단서를 폭로하면서 두 전직 대통령의 퇴임 후 보장도 물 건너갔다. 아마 비자금이 아니었더라면 YS도 광주 유혈진압과 군사반란만으로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세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DJ가 집권해 그런 일을 했더라면 정치보복 비판에 시달리고 지역감정이 불붙어 상황이 어려워졌을 수 있다. 그 점에서도 YS의 두 전직 대통령 사법처리와 하나회 숙청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고 그 위에서 DJ와 노무현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대로를 깔았다는 YS의 자평(自評)은 진실을 담고 있다.

그는 정세 판단의 천재였으며 그가 간 길이 옳았음을 역사에 증명했다. 민주화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산업화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고 산업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민주화를 높이 평가하려 들지 않는다. 최근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도 이 같은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어느 쪽에 있건 간에 YS가 한국 현대사에 기여한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