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 선생 서거 70주기 추모 학술 세미나 20일 열려
1922년 3월 18일 전 중앙학교 교장인 고하 송진우 선생(왼쪽에서 세 번째)이 중앙고등보통학교 제1회 졸업식에서 졸업생 앞에 앉아 있다. 설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과 최두선 전 교장(왼쪽부터), 현상윤 교장(오른쪽)의 모습도 보인다. 고하는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민족 대표들과 3·1운동을 준비했다. 동아일보DB
광복 뒤 발표된 이 정견은 언뜻 보면 ‘좌파’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3·1운동을 계획했다가 옥고를 치렀고 동아일보 3, 6, 8대 사장을 지낸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1890∼1945) 선생이 1945년 12월 21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자격으로 발표한 정견이다.
고하가 암살(1945년 12월 30일)당하기 며칠 전 ‘국민대회준비회’ 사무실(현 광화문 일민미술관 내)을 나서고 있다. 동아일보DB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고하와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기초를 세운 초기 자유주의는 건국 이후 한국의 가장 강력한 자유 민주주의 담론과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급진 공산주의와 우파 독재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대안이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자유권의 병적 발전, 곧 불합리 무절제한 자본주의를 저주할 뿐이다. …자유권은 정치적 생존권이며, 생존권은 경제적 자유권이다. …자유권이 없는 곳에 개성이 확충될 수 없으며, 생존권이 없는 곳에 평등적 문화를 완성할 수 없다.’
1926년 동아일보 주필이던 고하는 3월 5일자 신문에 국제농민본부가 조선 농민에게 전하는 ‘3·1운동 7주년 기념사’ 를 실었다가 일제로부터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DB
일제강점기 고하는 합법적 민족 정치단체 건설 논의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지만 타협적 자치를 주장하는 친일 정치세력과는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그는 1924년 동아일보를 통해 친일 정치세력이 결성한 ‘각파유지연맹’을 비판했다 가 인촌 선생과 함께 친일파 박춘금 등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권총으로 위협받는 이른바 ‘식도원 육혈포 협박사건’을 겪기도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