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자기소개 소설 쓰라는 거냐”
공기업이 요구하는 과도한 자기소개서는 취업준비생에게 ‘좁은 취업문’ 이상의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한 구직자가 기업들의 채용공고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 동아일보DB
올해 상반기에 채용연계형 인턴사원을 모집한 한국지역난방공사는 총 26개 항목에 걸쳐 8200자의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또 6월에 채용 절차를 진행한 중소기업진흥공단은 7개 문항 9000자, 한국주택금융공사는 5개 문항 4050자였다. 한국서부발전은 채용형 인턴사원 모집 자기소개서가 9개 문항 7000자에 이른다.
응답 문항 역시 △지원 분야의 구체적인 경험 △공사가 처한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 등 실제 업무능력과 무관하거나 신입사원에 걸맞지 않은 추상적 질문이 대부분이다. 지원자들 사이에서 “자기소개서인지 프로젝트 계획서인지 헷갈린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광고 로드중
올해 공공기관의 신규채용 규모는 총 1만7187명. 지난달 29일 입사지원이 마감된 공무원연금공단의 경우 신입사원 23명 모집에 5269명이 지원해 229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채용 담당자들은 “지원자가 몰리는 바람에 이를 걸러내려면 많은 분량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취업준비생 김모 씨(27)는 “거꾸로 말하면 ‘우리 회사는 재미없는 얘기를 길게 쓸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는 말 같다”며 “긴 자기소개서를 다 읽는지도 의문”이라고 반박했다.
직장인 한모 씨(34)는 “자기소개서 항목을 보면 모두가 리더십을 발휘하고 희생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며 “입사 후 경험에 비춰보면 근무에 필요한 역량과 조직 생활에 적합한 인성을 갖췄는지만 봐도 충분한데 모두가 비현실적 인재상을 요구하니 ‘자소설(자기소개 소설)’이 난무하고 취업 사교육까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뒤 한국 기업에 취직한 한원정 씨(27·여)는 정답이 정해진 듯한 자기소개서에 부담이 컸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기관들은 대부분 채용 시 이력서와 함께 자유 형식의 커버 레터(cover letter)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다. 한 씨는 “미국에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된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주변 친구들이 샘플을 내려받아 자신의 이야기를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을 보고 당황스러웠다”며 “정해진 형식의 자기소개서가 이상적인 답변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만드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광고 로드중
자기소개서가 까다로워진 것은 최근 공공기관이 도입하기로 한 국가직무능력표준(NCS)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NCS란 직무 수행을 위해 요구되는 지식·기술·소양의 기준을 정부가 표준화한 것으로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2002년부터 개발해왔다. 스펙 경쟁을 없애자며 도입했지만 직무 관련 경험을 과도하게 요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자기소개서 분량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정 씨는 “재무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전문 자격증을 준비했는데 갑자기 자격증은 배제하고 NCS 기반 자기소개서 비중이 늘어나 당황스럽다”고 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상명하달식의 정책보다 현장 실무자의 수요와 지원자들의 상황을 고려한 실효성 있는 채용 제도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NCS 등의 기준이 또 다른 사교육을 낳으면서 ‘채용 갑질’로 변질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민 kimmin@donga.com·유원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