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지 헬스케어 홍보회사 엔자임헬스 차장
대학에 가기 전까지 20년 정도를 함께 산 외할머니가 갑자기 생을 달리하면서 나는 큰 혼란을 겪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 오늘을 즐겁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지만, 한 번도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문상을 갈 일이 많아졌다. 검은색 옷도 몇 벌 샀고, 장례 예절도 익혀 두었지만, 그런 것들로 죽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런 내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처음으로 죽음의 맨얼굴을 보게 되었다. 팔십이 넘은 연세에도 시장에서 장사하실 만큼 건강한 분이었다. 중환자실로 실려 간 그날도 장사 준비를 하시다 잠시 쉬는 도중 쓰러지셨다 했다.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오기 전까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며 부모님 이상으로 사랑했지만, 멀리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안타까워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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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온전히 슬픔을 느끼고 외할머니를 추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친척부터 가족의 지인까지 여기저기서 손님이 쏟아져 들어왔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 화투판을 벌이는 사람들로 장례식장은 밤늦게까지 소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터라 장사를 어찌 치를지조차 정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생전에 납골이나 매장보다는 자유롭게 세상을 구경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을 남기셨다 해서 고민 끝에 멀리 여행을 떠나실 수 있도록 바다에서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기로 했다.
발인하는 날에 맞춰 장사를 치를 수 있는 배를 빌렸다. 육지에서 30분쯤 배를 타고 나가니 깨끗한 바다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외할머니를 보내드리는 순간에는 누군가 사지를 망치질하는 것처럼 아파왔다. 많이 울면 좋은 곳으로 떠나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 울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인간이 계기판이 달린 기계도 아니니 자유자재로 슬픔을 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힘든 이별을 마치고 배를 돌려 육지로 돌아가기로 했다. 햇볕이 너무 따가운 날이라 흘러내린 눈물과 땀마저 버석하게 말라버렸다. 가족들 모두 상복을 벗고 탈진하다시피 해서 서로 어깨를 기댄 채 갑판에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낯선 배 한 대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가족들 모두 지쳐 대답조차 하지 못하자 선장님이 대신 나서 바다에서 장사를 치르고 돌아가는 길이라 말해주었다.
육지가 보여 배에서 내릴 채비를 할 때였다. 큰 배 한 척이 갑자기 다가와 다시 배를 멈추기를 청했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선장님을 큰 배로 불러올렸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 초조해질 무렵 선장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바다에서 말을 걸었던 배가 우리를 신고했다는 것이다. 신고의 이유가 더 어이없었다. 간단한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은 탓에 우리가 한국말을 못하는 외국인이라 생각했고, 상복을 입지 않은 데다 말라붙은 땀과 눈물 자국으로 얼굴마저 꾀죄죄해 밀입국자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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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꼭 1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삶에 굴곡이 많았지만 늘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와 가족들에게 힘을 주셨던 분이셨으니 여러 날을 울며 보내는 우리의 모습이 편치만은 않으셨을 것이다. 장례 마지막 날 일어난 촌극 역시 아마 곁에 계셨으면, 그만 울고 내가 없어도 웃고 살라는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한 이별을 해도 내일은 다시 찾아왔다. 나 역시 그리움과 슬픔을 나만 아는 곳에 놓아둔 채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오늘만 있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 외할머니와의 이별을 겪으며 나 역시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어렵지만 행복한 일을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려 노력 중이다. 외할머니가 내게 그랬듯이 누군가 나를 생각할 때 슬픈 기억보다는 기쁜 기억이 먼저 떠오를 수 있도록 말이다.
손수지 헬스케어 홍보회사 엔자임헬스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