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정책사회부장
그때 지붕이나 벽체 일부를 부수고 목조 누각 안으로 들어가 물을 뿌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현장을 지휘하는 문화재청 국장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서울 중구소방서장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도 어려웠고, 판단할 권한도 사실상 없었다.
설령 그렇게 해서 불을 껐다고 치자. 고건축의 특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불길이 잡혀 연기밖에 나지 않는 상황에서 국보 1호를 훼손하다니. 현장 책임자를 문책하라”고. 이럴진대 현장 공무원이 어떻게 “국보 1호의 벽체와 지붕을 부수고 들어가자”고 결단할 수 있겠는가.
국보 1호의 일부를 부수는 것, 해양경찰이 세월호에 진입하는 것, 감염 정보를 공개하는 것 모두 현장 책임자가 결정해야 한다. 직급은 중요하지 않다. 국장급이어도 좋고 차관급이어도 좋다. 전권을 갖고 신속히 결정해야만 효과적인 대처가 가능하다.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 보고가 왜 그리 늦었는지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그건 불필요한 지적이다. 그 위중한 상황에 보고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보고를 하려면 육하원칙 갖추고 윗사람의 예상 질문 찾아 그에 대한 답까지 만들어야 한다. 지극히 권위적이고 비효율적인 과정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 때 질병관리본부장이 서울시 세종시를 오가며 보고하다 시간 다 보냈다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위기 대처의 핵심은 현장 책임자의 판단과 결정이다. 물론 그 책임자는 경험과 전문성이 풍부해야 한다. 그가 결정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따라야 한다. 장관이든 청와대든 대통령이든 예외는 없다. 설령 현장의 판단에 아쉬움이 남는다 해도 책임을 물어선 안 된다. 그래야 현장에서 신속 과감하게 판단하고 지휘를 할 수 있다. 결과에 대해 왈가왈부하면 현장 인력은 소심해지고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질병관리본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목도했다. 어디 이뿐이랴. 현장과 전문성을 무시하는 행태는 지금도 도처에서 횡행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