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그런 점에서 아모레퍼시픽의 ‘이니스프리’는 제주의 사소함을 기막히게 잘 풀어내는 브랜드다. 난 청보리 클렌저와 비자나무 방향제를 쓰면서 가파도 청보리밭과 비자림을 떠올리곤 한다. ‘제주 컬러 피커-김녕’ 아이섀도는 김녕 해변의 하늘, 바다, 모래 색을 고스란히 닮았다. 제품 소개서엔 이런 설명도 있다.
“숨이 턱 밑에 차오를 때까지 물질을 하다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물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때 눈에 들어오는 바다의 색은 정말 고와요. 파랑도 아니고 연두도 아니고, 아, 모르겠어요. 그건 그냥, 김녕 바다색인 거죠.”(바다농사 경력 50년의 김녕 해녀 이은화 님)
광고 로드중
돌이켜보면 가슴에 오래 남는 건 사소한 것들이다. 오래전 일본의 어느 시골에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꼭 가보라고 했던 미술관은 그저 작은 동네 미술관이었는데, 주민들은 그곳을 정말로 대단하게 여겼다. 며칠 전 배우 원빈-이나영 커플의 결혼식이 잔잔한 감동을 준 것도 강원 정선 밀밭 오솔길과 들꽃 부케의 소박한 힘 아니었을까.
제주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소란스러워졌다고, 치안이 염려된다고, 천혜의 자연이 훼손된다고, 중국인에게 점령될 거라고. 그래서 생각해본다. 우리는 얼마나 제주를 귀하게 대하고 있는가. 제주의 사소한 것에 경의를 표하는가.
제주는 숲, 오름, 바다가 있는 한국의 대표 관광지다. 나는 제주 관광을 시대별로 분류해 봤다. 1.0은 용두암(관광지) 시대, 2.0은 올레길 시대, 3.0은 낭만카페 시대…. ‘제주 관광의 4.0’은 사소함을 즐기는 문화예술 시대면 좋겠다. 제주의 품격을 고민하면 좋겠다.
나는 지난달 제주 여행에서 중국 유명 현대 미술가 펑정제 씨(47)를 만났다. 베이징에 사는 그는 2년 전 제주 한경면 저지예술마을에 ‘펑 스튜디오’라는 작업실을 열고 제주를 오간다. 그곳에서 그가 요즘 작업들을 보여줬을 때 깜짝 놀랐다. 제주가 그의 화풍을 바꿔 놓았다. 두 눈동자가 양 바깥으로 향하는 외사시(外斜視) 여성 그림으로 유명해진 그는 이제 제주의 산수(山水)와 골프장 홀의 좌우(左右)와 같은 추상 문자그림을 그린다.
광고 로드중
펑 씨는 가난한 노동자와 문맹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톈안먼(天安門) 사태 때 쓰촨 미술학원에 다녔다. 소비에 돌진하는 중국인의 공허한 정신을 외사시 여성으로 표현해 부를 쌓은 그가 제주에서 ‘소비 너머의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베이징 ‘798예술구’(1950년대 군수공장에 1990년대부터 예술가들이 모여든 세계적 명소)와 같은 예술구를 제주에 만드는 일도 추진 중이다. 우리가 못 한 일을 하겠다니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니까 ‘파랑도 연두도 아니고, 그건 그냥 바다색’을 알아보고 귀하게 대하기. 제주 관광 4.0, 품격 있는 한국 관광이 갈 길이다.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