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첫 출가… 북한산 덕륜사 도현 스님의 ‘부처님오신날’
“출가하기 전까지 내 얼굴엔 근심과 그늘이 가득했었죠.” 22일 동국대 정각원 앞에서 만난 도현 스님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올해 동국대 불교학부에 입학해 통일을 고민하는 동아리 ‘하울림’을 만들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나무를 수입했다. 어머니는 나진시당 간부였다. 돈 많은 아버지는 당에 뇌물을 바쳤다. ‘아버지와 달리 뇌물을 받는 당 일꾼이 될 테다.’ 꿈은 순조로웠다. 그와 상관없는 집단 싸움으로, 복무하던 강원 통천 부대 전체가 2008년 강제 전역당하기 전까지는….
○ 자유 찾아 온 한국서 부(富)를 좇다
그 충격으로 석 달 뒤 국경을 넘었다. ‘한국에 가 북한이 이토록 나쁘다고 알리면 모든 게 바로잡힐 수 있을까….’
2009년 천신만고 끝 한국 땅을 밟았지만 종일 방을 닦아도 때가 지지 않는 임대아파트가 실망스러웠다. 기대했던 한국의 모습과 달랐다.
마음의 그늘은 육신의 병으로 옮아갔다. 왼쪽 목덜미에 귤만 한 혹이 났다. 원인 모를 열꽃이 피었다. 온몸에 벌건 물집이 다닥다닥 피어올랐다.
2년 만에 미국행을 택했다. 중국인의 뉴욕 네일숍에서 일했다. 많이 벌 땐 한 달에 1만 달러(약 1100만 원). 한국서 맛보지 못한 풍족함을 누렸다. 뉴욕 맨해튼에서 명품을 쇼핑했다. 하지만 그가 거액을 빌려 준 중국동포가 돈을 갚지 않아 시비가 붙었다. 중국동포가 경찰을 부르자 추방의 두려움에 캐나다로 도망쳤다. 두 번째 한국행은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 한국에서 속옷을 기워 입다니
2013년 그는 산속의 절을 떠돌았다. ‘북한에 가 죽는 게 나을까….’
서울 구기동 북한산 자락 조계종 덕륜사에 발길이 닿았다. 노(老)스님과 젊은 주지스님 둘이 사는 작은 절.
빨랫줄에 넌 속옷이며 양말을 온통 이불 천으로 기웠다. ‘대한민국에도 저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니….’ “불자들이 부처님께 정성으로 기도한 시줏돈, 우리 돈 아닙니다. 함부로 써 사리사욕 채우면 죄 짓는 겁니다.” 주지인 학수 스님의 일성이었다. 마음이 동했다.
도현(度炫) 스님(32). 부처님의 법도로 세상을 밝히라는 것. 노동당 간부가 되고 싶었던 북한 소녀가 받은 법명이다.
○ 권력-부, 내 것 아니라고 깨달으니 행복
승복에 받쳐 입는 속옷, 공양할 채소까지 가장 싸고 소박한 것만으로 채운 그의 수행 생활은 ‘무소유’다. 불자들이 입고 싶고 사 먹고 싶은 것 참아 공양한 쌈짓돈 허투루 쓰면 참된 수행이 아니라는 신념 때문이다.
“북한서 동경한 권력, 한국서 가지려 했던 부, 모두 본디 내 것이 아님을 깨달으니 이제야 진짜 자유와 행복이 오네요.”
올해 1월 어머니가 그의 탈북으로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부모 잡아먹은 자식”이라는 죄책감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훌륭한 부모님이 수행자의 삶으로 안내해 주고 떠난 것”이라는 주지 스님의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북한에 있을 때 헐벗은 많은 이들을 보고도 ‘나는 이렇게 살고 저들은 저렇게 사는구나’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들을 도우리라 결심합니다. 유일 영도 체제에 구속되지 않은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알리려 합니다. 한국에 뿌리내리지 못한 탈북민을 끌어안으려 합니다.” 그의 얼굴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