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도쿄 특파원
2012년 6월 도쿄로 부임하면서 일본엔 망언을 일삼는 정치인만 있는 게 아님을 보여 주려 했다. 일본 문화의 힘, 경제 저력, 사회 전반에 스며든 예의와 질서 등을 기사화하려 노력했다. ‘노벨상 강국 일본의 교훈’, ‘정전대란 없는 일본 절전 비결’ 등과 같은 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부임 첫해 겨울 첫 시련이 찾아왔다. 우파 성향 정치인 중에서도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의원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는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담은) 역대 담화들을 수정하겠다”, “침략의 정의는 없다”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내가 일본을 잘못 알았나’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시련은 지난해 말에 찾아왔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인 지인들이 대놓고 한국 비판에 가세한 것이다. 그들은 페이스북에 떠도는 혐한 기사에 ‘좋아요’를 눌렀다. “위안부 사과하란 말을 언제까지 반복할 것이냐”고 댓글도 달았다. 아베 정권 들어 일본 사회가 전반적으로 우경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일본에 대한 실망감이 말할 수 없이 커졌고 애착은 급속도로 식었다.
그럼 아베 총리가 물러나고 새 총리가 들어서면 일본이 달라질까. 아무래도 아닐 것 같다. 일본은 기자가 교환학생으로 지냈던 15년 전과 너무나 많이 변했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익 정치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과거사에 대해 (주변국에) 사과할 만큼 했다’고 여긴다. 일본 사회는 점차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나아가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일본 주류로 등장하면서 나타나고 있다. 요즘 일본 내에선 가해(加害)의 역사가 지워지고 있다. 조선인 강제동원과 중국 난징대학살 유물을 전시했던 박물관인 피스오사카(Peace Osaka)의 경우 7개월간 공사한 후 지난달 다시 문을 열었는데 가해 자료가 모두 사라졌다. 한국인을 강제 동원해 공사했던 터널, 비행장 등지의 안내문 등에선 ‘강제동원’이란 단어가 삭제되고 있다. 전후 세대들이 주축이 된 일본 정부는 패전 후 폐허에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거듭난 ‘자랑스러운 일본’을 강조할 뿐이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일본의 전후 세대들에게 “과거사 반성부터 하라”고 강요한다면 한일 관계 개선은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요즘 일본에서는 ‘아예 한국을 무시해 버리자’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전쟁 가능 국가 일본을 이웃에 둔 한국은 이제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할 때다. 한동안 중국은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를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삼고 힘을 키웠다. 그 결과 미국은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을 더이상 무시하지 못한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