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아베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 만행을 시인하고 사과할 것인지는 이미 한민족의 자존심이 걸린 상태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와 맥락이 모두 엄청나게 중요한 취재 대상이었다. 2013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이 워싱턴을 찾았을 때보다 바빴던 것이 확실했다. 한국 언론은 일본 언론 다음으로 관련 기사를 많이 썼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아베 총리는 미 연방 상하 양원 합동연설에서 아시아 청중을 외면했다. 대신 “우리(일본)의 행동(침략과 식민지 지배)은 아시아 국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줬다”라는 말로 대신해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의 공분을 샀다. 하지만 그의 예상된 ‘오리발’은 미국 내 지성들의 반발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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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 측의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여론을 의식한 청와대와 외교부가 조바심을 내면서 ‘워싱턴 한국 외교 인력의 75%가 아베 뒷다리 잡기에 동원됐다’는 소문이 워싱턴에 퍼졌다. 주미 한국대사관에 업무 지시를 내리는 북미(北美)국 산하 북미1과는 최근에는 ‘미일(美日)과’로 불리고 있다는 후문이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북한 문제 공조 등 더 중요하고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문제에 투자되어야 할 한국의 대미(對美) 외교 역량이 ‘워싱턴을 통해 대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한다’는 과거 지향적 명분 외교에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지 이미 오래다. ‘아베의 태도를 바꿔 달라’는 부탁을 오랫동안 받아야 하는 미 당국자들의 피로감도 누적되고 있다.
프랭크 자누지 맨스필드재단 소장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 관계를 중재(mediate)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미국은 한국의 우려와 일본의 견해를 듣고 대화를 증진시키는 알선(good offices)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비용과 위험을 안고 동맹국 미국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아베 총리의 미래지향적이고 실리적인 대미 외교는 한국에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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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사드 배치 대신 추진하겠다는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체계 구축 사업에 배정해야 할 예산을 복지 사업에 돌리고 있는 상황은 미국에 안보를 무임승차하겠다는 의도로 비칠 우려가 크다. 글로벌 현안에 대한 기여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시리아 난민 지원에 5억9000만 달러를 내놓은 상황에 한국은 고작 1000만 달러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