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는 실존인물… ‘서동요’ 주인공 실존 밝힐 유물 발견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존 처리 과정에서 익산 쌍릉 소왕묘에서 출토됐다는 사실을 밝혀낸 ‘금동 밑동쇠’(위쪽 사진). 이 밑동쇠의 가운데 구멍(화살표)에 쏙 들어가는 ‘금동 널꾸미개’(가운데)는 이 중 ①번 하나뿐으로 소왕묘에서 출토됐음을 알 수 있다. 윗부분의 금동장식을 서로 비교해보면 ①번이 대왕묘에서 나온 ②번에 비해 문양이 더 입체적이고 세련돼 고고학적으로 볼 때 만들어진 시기가 앞선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 사진은 복원한 밑동쇠와 널꾸미개를 결합해 목관에 고정시킨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옛날에 ‘마를 캐는 아이(薯童·서동)’라고 불린 소년이 있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던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서라벌로 향한다. 첫눈에 반한 그는 공주를 아내로 맞겠다고 결심하고 꾀를 하나 낸다. ‘선화공주는 남몰래 밤마다 서동을 만난다’는 가사의 ‘서동요(薯童謠)’를 아이들이 부르도록 한 것. 딸을 오해한 진평왕은 공주를 귀양 보냈고, 궁 밖에서 기다리던 서동은 그녀를 유혹한다. 신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서동은 훗날 백제 30대 무왕(?∼641)이 된다.
항공사진으로 본 전북 익산시 쌍릉. 위쪽의 상대적으로 작은 무덤이 왕후가 묻힌 소왕묘이고, 아래 큰 무덤은 백제 무왕이 묻힌 대왕묘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이병호 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이 밑동쇠와 딱 들어맞는 소왕묘 출토 ‘금동 널꾸미개’(金銅製棺裝飾·목관의 뚜껑과 측판을 연결해주는 장신구)를 찾아냈으며, 이것이 무왕이 묻힌 대왕묘의 널꾸미개에 비해 문양과 제작기법에서 시기적으로 더 앞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왕비가 묻힌 소왕묘가 무왕의 대왕묘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이는 무왕과 함께 쌍릉에 묻힌 왕비가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사택(沙宅)왕후가 아님을 방증한다. 왕후가 왕보다 나중에 죽었는데 묘가 먼저 만들어질 순 없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택왕후는 무왕보다 1년 뒤인 서기 642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학예관은 “쌍릉 소왕묘는 사택왕후의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소왕묘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 학예관은 ‘백제 사비기 익산 개발시기와 그 배경’ 논문에서 소왕묘에서 나온 금동 밑동쇠가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인근의 백제 왕릉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부부묘 형태다. 고려사 지리지와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익산 쌍릉에 묻힌 인물이 무왕과 왕후라고 적혀 있다. 이 학예관은 “7세기 전반에 죽은 인물로 무왕의 또 다른 왕비였던 선화공주가 묻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관련 문헌이나 유물에 적시된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이외에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의 미륵사지 서(西)석탑의 사리봉안기와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화공주가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백제와 신라가 전투를 벌이던 당시 상황에서 백제가 신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논리도 한몫했다.
조선시대와 달리 주자성리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왕이 정비(正妃)를 여러 명 거느릴 수 있었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고려 태조 왕건은 정비만 6명을 뒀다”며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모두 무왕의 정비였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와 관련해선 오히려 전시를 맞아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왕실이 혼인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노 교수는 “정략적으로 선화공주를 왕비로 들였을 개연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