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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단독]고종의 ‘항일 스파이’… 러와 손잡고 싸웠다

입력 | 2015-02-28 03:00:00

3·1운동 96돌… 유학생 9명, 러 정보국서 첩보활동




고종 황제

‘한국의 황제(고종)가 졸업생들이 어디에 있는지, 잘 있는지 궁금해한다.’

‘한기수와 강한택은 나와 함께 있으며 오운석은 부령, 윤일병은 북청, 현홍근은 노보키옙스크, 구덕선은 종성에 각각 잠입해 있다.’(1904년 9월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 암호 전문)

1902년 12월 서울 경운궁. 고종은 인사차 찾아온 카를 베베르 전 주한 러시아공사에게 “관립노어학교 졸업생 10명을 러시아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고 부탁했다. 베베르는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2년 뒤 고종이 러시아의 상하이 정보국을 통해 특별히 안부를 물었다는 졸업생은 바로 이들이다. 이때 그들 중 9명은 이미 러시아의 정보요원이 돼 있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유학생들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대항해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러시아 국립역사문서보관소를 통해 당시 작성된 러시아 정부의 비밀 문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최근 드러났다.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 항쟁에 나섰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료로 평가된다.

최 연구위원의 ‘고종 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 논문에 따르면 고종이 세운 관립노어학교 졸업생 9명은 러시아 정보기관인 ‘상하이 정보국’에 소속돼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부터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함경도와 만주, 노보키옙스크 등에 파견돼 한-중-러 접경지대에서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 고종, 시종무관 통해 러 상하이정보국과 비밀 교류 ▼

고종의 ‘항일 스파이들’
대한제국 노어학교 출신 9명 등… 만주 등 잠입해 일본군 동향 파악
“고종황제, 그들의 안위 궁금해 해”… 러 정부 비밀문서 연구서 드러나


1904년 당시 러시아의 ‘상하이 정보국’이 있었던 러청은행 건물. 현재는 중국외환거래센터가 들어서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이에 앞서 러시아 외교부는 러일전쟁을 앞둔 1904년 4월 알렉산드르 파블로프 주한 러시아공사의 주도로 중국 상하이 러청은행 건물에 상하이 정보국을 세웠다. 일본 측의 정보전에 대응해 군사정보를 수집하고 방첩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상하이 정보국 한국분과에 관립노어학교 출신 유학생 9명이 배치됐다.

1904년 4월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을 세운 알렉산드르 파블로프 주한 러시아공사(왼쪽)와 고종의 시종무관으로 함경도에서 첩보 활동을 벌인 김인수.

이들은 △니즈니노브고로드 군사학교의 오운석 구덕선 △추구옙스키 기병학교의 현홍근 윤일병 윤세년 △쿠르스크 군사아카데미의 김낙운 강한택 한기수 등이었다. 이 밖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한국어과 강사였던 김병옥과 카잔신학교 한국인 유학생 5명도 중국 펑톈(奉天)의 러시아 만주군사령부 통역으로 차출됐다.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는 함경도로 파견돼 첩보 활동을 벌였다.

러시아 군사학교 유학생 9명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5월경 러시아 연해주의 노보키옙스크로 모인 뒤 곧바로 팀을 이뤄 임무 지역으로 잠입했다. 최 연구위원은 “사전에 고종과 러시아 측의 협의가 있었기 때문에 유학생들을 각지로 신속하게 보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최근 발견된 1908년 ‘상하이 정보국’ 기밀 보고서.

고종은 시종무관인 현상건을 통해 상하이 정보국과 지속적으로 비밀리에 접촉했다. 현상건은 러시아 추구옙스키 기병학교 출신으로 고종과 상하이 정보국을 잇는 막후 채널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04년 국내에서 의병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 고종은 1904년 4월 14일 발생한 경운궁 화재가 자신에 대한 살해 시도로 보고 상하이 정보국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러 정보 협력에 맞선 일본 측의 비밀공작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주러 일본대사관 무관이던 아카시 모토지로 대령은 제정 러시아 내 반정부 세력과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추진하던 핀란드, 폴란드, 조지아 측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다.

러일전쟁 패전으로 상하이 정보국은 1905년 11월경 일시 해체됐다. 그러나 일본의 간도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새로운 인물인 레프 고이예르 상무관을 내세워 1908년 상하이 정보국을 재건했다. 당시 비밀 문건 중에는 고이예르가 2차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한국 의병들에게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는 계획을 세운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무렵 고종의 심복인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한-러 정보 협력의 대가로 수만 명의 의병으로 구성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측과 협의했다. 그러나 이상설의 계획이 러시아의 비협조로 실패하면서 항일의 방식을 놓고 양측의 시각차가 드러난다. 러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과 화해 국면에 들어간 러시아가 한국의 적극적인 무장 투쟁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6·25전쟁과 냉전을 거치면서 사회주의권이던 러시아, 중국과의 항일 공동 투쟁사가 그동안 한국사의 사각지대에 있었다”며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이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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