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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으로 포장된 ‘사생활 캐기’는 그만

입력 | 2015-02-23 03:00:00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2월의 주제는 ‘약속’]<32>직장 내 프라이버시 존중을




한때 함께 근무했던 회사 상사를 1년 만에 길에서 마주친 직장인 김모 씨(30·여). 반가운 마음에 “안녕하세요, 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라고 인사하자마자 “너 근데 임신 안 하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 씨는 “보자마자 임신 얘기부터 하는 통에 난감했다”며 “아이를 갖지 않기로 남편과 합의했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직장에서는 혼기가 찬 여직원에게 “결혼은 언제 하느냐”고 묻는 선배 직원이 적지 않다. 한국에서는 대개 이런 질문을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사생활 침해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사생활 관련 질문이 특정 개인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만큼 직장 내에서 넘어서는 안 될 선(線)을 스스로 정하는 ‘약속’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서울에 있는 연매출 2000억 원대 정보기술(IT) 중견기업 A사. 이 회사 직원 10여 명에게 직장 내 프라이버시 침해 사례를 물어봤다. 직장에서 이뤄지는 ‘사생활 추궁’은 결혼과 출산뿐 아니라 자녀의 학교 성적, 재산 등 인생 전반에 걸쳐 다양했다.

사내 연애를 하다 2년 전 여자친구가 퇴사한 직원 정모 씨(33)는 사내 인사를 만나는 게 고역이다. 그는 “지나갈 때마다 큰 소리로 ‘여자친구하고 잘 지내냐’는 질문을 하는 상사가 많다”며 “모든 직원에게 ‘헤어졌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것만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고 말했다. 이 회사에서는 회식 때마다 직원의 연애 사실을 전체 직원에게 공개하는 상사 때문에 연애를 시작해도 회사 동료에게 알리지 않는 ‘전통’을 가진 부서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부부의 출산 문제는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아들을 낳고 6개월 전 복직한 주모 씨(33)는 “6개월 동안 ‘둘째는 언제 낳느냐’는 질문을 시어머니보다 지금 부서장에게서 더 많이 들었다”고 전했다.

간부가 돼도 고민은 여전하다. 중간 관리자인 임모 씨(45)는 최근 회사 선배와의 대화 도중 “어디 사느냐”는 질문을 받고 “경기 ○○시에 산다”고 답했다. 그는 즉시 “왜 하필 집값이 떨어지는 곳에 사느냐”는 타박과 함께 한참 동안 ‘재테크 강좌’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직원은 “살던 집을 월세 주고 이사를 갔는데 월세 수입이 얼마인지 묻는 직장 상사도 있었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사생활 침해는 비단 A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과거 가족 중심의 공동체에서 이미 개인 중심으로 바뀌었지만, 직장문화가 이를 따라잡지 못해 나타나는 일종의 ‘문화지체(文化遲滯)’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직장 상사들이 자신의 프라이버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아래 직원들에게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며 “불임이나 이혼 등 밝히기 어려운 개인의 사정도 많은 만큼 회사 내의 ‘프라이버시 에티켓’을 공공장소에서 기초질서를 지키는 것처럼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명 jmpark@donga.com·이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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