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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 사상사, 협상 기술… 외교戰 완전무장 341일

입력 | 2014-12-27 03:00:00

[토요기획]非고시 외교관 후보자 첫 수료




341일간의 국립외교원 외교관 후보자 정규 과정을 마친 33명이 이달 17일 외교부의 임용식을 통해 정식 외교관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진은 외교관 후보자 과정 1기생들이 국립외교원의 모의 국제회의 수업에 참여해 토론을 위한 준비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 교과목은 공직소명의식, 전문지식, 외교역량 및 외국어 수업 등으로 이뤄진다. 국립외교원 제공

11월 21일 국립외교원(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에서 외교관 후보자 정규과정 수료식이 열렸다. 처음 시도된 외교관 후보자 과정을 마친 43명의 수료생이 이날 배출됐다. 연구원은 “지난해 12월 16일 입교한 후보자들이 341일간의 교육을 마치고 외교관으로서 기본 능력을 배양했다”고 밝혔다. 이들 중 33명이 17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임용 환영식을 갖고 정식 외교관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일부는 학업을 마쳐야 하는 등 개인 사정으로 임용을 미뤘고 4명은 후보자 과정을 마치고도 임용 기회는 갖지 못했다. ‘10% 의무 탈락’ 규정 때문이다.

“우리의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전신) 시절 연수 생활은 지금에 비하면 천국이었죠. 마음껏 책을 읽고 탁구도 시끄럽다고 야단맞고 그만 치자고 할 때까지 쳤으니까요. 외교관 후보자들은 그런 여유가 없었을걸요?”

지난달 21일 국립외교원에서 열린 외교관 후보자 과정 1기 수료식에서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오른쪽)이 수료생에게 수료증을 수여하고 있다. 국립외교원 제공

2년 전 시보(試補)를 떼고 외교관 생활을 하고 있는 A 2등서기관의 회고다. 외무고시 마지막 세대인 A 씨에게 연수 시절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고시 합격까지의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20여 명의 연수 동기들은 경쟁 상대라기보다는 동료였다. 밟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덜했다. 연수 성적 1, 2등에게는 희망 부서를 택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지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올해 처음 배출된 외교관 후보자들은 처지가 달랐다. 입교생 가운데 10%는 반드시 떨어지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상대를 떨어뜨리지 못하면 내가 떨어지는 피말림 속에 힘겨운 1년이 갔다.



53년 만에 바뀐 외교관 선발제도

한국의 외교관 선발 제도는 1950년 6·25전쟁 당시 고등고시 행정과 3부(외무) 시험으로 시작됐다.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에 따르면 1957년 시험의 경우 합격자가 1명밖에 없어 이듬해 다시 뽑아야 할 정도였다. “첫 월급을 받아 구내 다방 외상 커피 값을 치르고 나니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할 만큼 처우가 열악했다. 하지만 외교관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고(1974년 외무고시로 변경) 2006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면서 상한가를 쳤다. 체계적인 외교관 양성을 위해 2013년 외교관 후보자 과정이 처음 도입됐다. 새 제도가 시작되면 ‘외교관 자녀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할 것’ ‘현대판 음서(蔭敍·관직 대물림)제도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많았다. 하지만 1기 후보자 가운데 외교관 자녀는 0명. 외국에서 최종 학교를 마친 사람도 1명에 불과하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 ‘외교관 후보자 선발 시험’을 검색하면 “외시에 있던 논문형 제2외국어와 영어 시험이 없어지고 1차 시험 대체자격(성적표 제출)으로 바뀌었을 뿐, 기존 외시와 차이가 없다”는 답변이 있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선발은 공직적격성평가(PSAT), 전공평가 및 학제통합 논술시험, 면접 3단계로 치러지는데 외시에선 볼 수 없었던 문제 해결형 논술에서 당락이 크게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외국어 능통자보다 한국말 논술에 강한 사람이 유리하다. 외국 생활을 겪어보지 못한 지원자 중에 합격자가 더 많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한시도 마음 놓지 못하는 하루 일과

‘고난의 341일’을 견뎌낸 후보자 B 씨의 말을 빌려 하루를 재구성해 보자.

“오전 9시부터 강의실에서 1교시 수업이 시작된다. 아침을 먹지 못한 사람들은 허겁지겁 김밥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당초 외교관 후보자는 기숙사 생활을 할 거라고 들었는데 실제 들어와 보니 출퇴근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루 수업은 총 5교시. 80분 수업에 쉬는 시간은 10분이다. 강의실이 바뀌기라도 하면 화장실 다녀오랴, 다음 수업 준비하랴 정신이 없다. 해가 떠 있을 때는 사실상 쉴 시간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3학기 교육이 한창이던 10월 셋째 주를 예로 들면 20일(국제정치 사상사 80분, 협상 및 외교역량 종합연습 160분, 전문 분야 160분), 21일(제2외국어 80분, 협상 및 외교역량 종합연습 80분, 지역통합 80분, 대한민국 외교사 160분), 22일(공공외교 80분, 협상 및 외교역량 종합연습 160분) 식으로 수업이 배정돼 있다.

낮 12시에 시작되는 점심은 구내식당을 이용하거나 외부에 나가 사먹는다. 양재역 근처에 맛집이 많다던데 가본 적은 없다. 잠깐 낮잠을 자기에도 부족한 점심시간은 대부분 그룹 과제를 위한 모임을 갖는다.

오후 6시. 정규수업이 끝나면 각자 흩어진다. 일부는 집으로 가지만 대부분 저녁을 먹고 다시 강의실로 돌아와 과제를 하거나 자료를 읽는다. 1∼3학기 동안 후보자 1명이 읽어야 하는 자료량은 8000쪽이 넘는다. 책을 읽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한밤중. 외교원 현관문을 닫는 밤 12시에 맞춰 집으로 나선다.”

평가 기간이 되면 사정은 더 나빠진다. 11과목 시험을 치는데 한 과목당 2시간씩이다.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모든 시험은 컴퓨터로 입력한다. 과목당 A4용지 10장을 넘기는 건 기본. 하루에 세 과목을 치른 날, 여자 후보자 1명은 시험이 다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기도 했다. 이수해야 할 과목이 워낙 많다 보니 밤샘과 코피는 예사였다.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은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2년 동안 가르치는 내용을 1년 과정에 압축하다 보니 요구 수준이 높아졌지만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외교관을 길렀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다만 연구원은 과목 수가 너무 많다는 지적에 따라 2기 후보자 과정을 일부 조정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실제 외교관이 맡는 업무 실전연습

과거 외시에 합격한 연수생들은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에서 4개월 교육을 받은 뒤 시보로 배치됐다. 4개월은 외교부 본부의 국(局)별 업무를 소개하기도 빠듯했다. 하지만 이번 후보자들은 1년간 그야말로 외교관이 되기 위한 하드트레이닝을 받았다. 교육은 4가지 축으로 이뤄져 △공직소명의식 △전문지식 △외교역량 △외국어로 구성됐다. 분야별 수업시간 배분은 1 대 3 대 3 대 3이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과거 외시 출신들이 전체 비중의 30%에 해당하는 전문지식만 평가받았다면 외교관 후보자들은 훨씬 종합적인 평가를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3학기 동안 총 6번의 중간·기말평가는 물론이고 수시로 발표와 과제물을 평가한 뒤 이를 순위로 매긴다. 외시 출신들은 해보지 못한 외교 전문(電文) 작성을 비롯해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처럼 양자 협상, 북핵 6자회담 등 다자 협상도 두루 경험했다.

후보자들도 만족스럽다는 평가를 내린다. B 씨는 “국제법을 예로 들면 교과서에서 보던 일반 이론이 아닌 최신 국제법 동향이나 한국과 관련된 독도, 일본군 위안부, 북한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선배 외교관과 직접 토론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영어도 1년간 집중 학습을 통해 모든 수료생들이 영어로 발표 수업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쌓았다. 영어 시험이 없는 외교관 후보자 선발 제도에서 영어 성적 하한선은 토익 870점, 텝스 800점 등 웬만한 대기업 입사 기준보다 낮다.



다양한 연령, 배경 가진 후보자

가장 나이가 많은 후보자는 33세. 다른 안보부처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외교관이 되기 위해 다시 입학했다. 가장 어린 후보자는 21세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후보자가 된 이 후보자는 남은 2년간 학교생활을 마저 끝내야 공무원이 될 수 있다. 12세의 나이 차만큼이나 다양한 경력과 배경을 가진 이들이 후보자가 됐다.

후보자들은 170만 원의 5급 사무관 초봉에 해당하는 월급을 받는다. 기숙사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월세를 얻고 생활비를 내기에 넉넉한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이 돈으로 자신의 생활비를 해결한 것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부양한 후보자도 있었다. 과제물 준비도 빠듯한데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가 집안일을 도운 후보자가 있는가 하면 누가 시키지 않고 평가항목에도 없지만 주말에 인근 강남보육원으로 팀을 짜서 봉사활동을 다녀오고 서울 외곽 전통마을에서 벽화 그리기 재능기부를 하기도 했다. 교육과정을 담당했던 인남식 교수는 “탈락 제도의 특성상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야수가 길러질지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지내보니 괜한 걱정이었다”고 말했다.



10% 최종임용 탈락자 구제는 관건

지난해 치러진 1차 후보자 선발시험은 512명이 응시해 43명이 11.9 대 1의 경쟁률을 통과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외교관으로 임용되는 건 아니다. 이 중 10%인 4명은 반드시 탈락한다. 전 세계 외교 아카데미 가운데 1년 교육 후 탈락자를 가려내는 제도를 운영하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 ‘10% 탈락’ 제도 때문에 사실상 4차 관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합격권에 든 C 씨는 “제도적으로 미임용자가 발생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1년을 함께 지낸 동료가 미임용될 때 느끼는 심리적 허탈함은 말할 것도 없고 1년 동안 막대한 세금을 들여 기른 인재를 국가 차원에서 활용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외교원도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깊다.

윤 원장은 “최종 임용 명단에는 못 들었지만 탈락자도 우수한 인재이기는 마찬가지”라며 “이들이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다양하게 취업지도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제인력에 대한 수요가 많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이들을 특채로 임용하겠다는 의사를 받아두었다. 국제기구와 관련된 국내 기관과도 접촉하고 있다. 다만 탈락한 당사자가 이를 받아들여야만 성사될 수 있는 방안이어서 외교원은 조심스레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당초 10% 탈락 규정은 후보자들에게 긴장감을 부여하고 학습의욕을 높이려는 취지로 도입했다. 하지만 ‘1년을 공부한 뒤에도 탈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인재들이 응시 단계에서부터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도 되고 있다. 1기 후보자 과정에서 당초 45명을 선발할 계획이었지만 지원 미달로 ‘지역외교’와 ‘외교전문’ 분야에서 1명씩 적은 8명과 3명만 뽑아 43명이 됐다. 국제법 등 해당 분야에서 직업을 갖고 있는 전문가가 외교관 되기를 시도하기에는 ‘1년 후 탈락’의 위험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최근 끝난 2기 후보자 선발에서도 일부 분야에 미달이 발생한 만큼 ‘10% 의무 탈락’ 제도를 보완할 지혜가 발휘돼야 할 시점이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