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에서 ‘미생’까지 20대 男主 캐릭터의 변화상
화제의 드라마인 tvN ‘미생’ 속 장그래(임시완)의 외모에선 20대 남성 주인공들이 풍기던 ‘수컷 냄새’나 반항적인 이미지를 찾기 어렵다. ‘미생’의 이재문 tvN 기획 PD는 장그래 역 캐스팅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이 ‘착한 이미지’라고 했다. 그는 “키 크고 조각 같은 미남이 아닌, 지금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얼굴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예전의 남자 주인공들과 달리 순응적이다. 프로 바둑 기사 입단에 실패한 고졸 출신 주인공은 대기업에 계약직으로 입사해 숱한 차별을 겪는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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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장그래처럼 드라마에는 세대를 상징하는 청춘들이 등장한다. SBS 드라마 ‘모래시계’(1995년) 속 태수(최민수)는 민주화운동 세대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한국의 1970,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에서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시민군으로 참여한 경력을 가진 조직폭력배다. 세상을 바꾸길 꿈꾸다 부조리한 시대의 희생양으로 사형당하는 그는 남겨진 이들의 부채의식을 자극한다. 태수는 광주에서 계엄군이었다고 고백하는 검사 친구 우석(박상원)에게 말한다. “그 다음이 문제야.”
다른 세상을 꿈꿨던 태수와 달리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트렌디 드라마의 20대 청춘은 사랑에만 몰두하는 개인주의자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생인 이들은 경제 호황기에 성장한 X세대다. MBC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년)의 강풍호(차인표)는 미국 유학파로 아버지의 백화점 사업을 물려받은 재벌2세다. 유창한 영어실력에 할리데이비슨을 몰고 색소폰을 즐겨 부는 그의 모습은 당시 언론이 보도한 X세대의 이미지와도 일치한다.
강풍호류의 캐릭터들은 현재까지 여러 드라마에서 다양한 ‘실장님’과 ‘이사님’으로 변주돼 나오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친 후엔 이와 상극을 이루는 비주류 캐릭터들도 부상하기 시작했다. ‘네 멋대로 해라’(2002년) 속 소매치기 전과자 출신인 고복수(양동근)는 당시 20대 청춘의 얼굴로 사랑받았다. 배경도 외모도 변변찮은 그는 ‘루저’이다. 세상에 대한 불만도 없고 자신의 처지를 바꾸는 데도 관심이 없다. 극 초반에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는 그는 미래보다는 현재에 몰두한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 현재를 중시하는 태도는 X세대 이후 Y세대, 밀레니엄세대 등의 다양한 별칭으로 주목받았던 에코세대의 특징으로 꼽힌다.
2014년의 장그래도 고복수와 같은 비주류다. 하지만 주류 진입을 꿈꾼다는 점에서 앞 세대의 선배 캐릭터들과 선을 긋는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고 채찍질한다. 이 때문에 장그래 캐릭터의 부상이 기성 시스템에 대해 젊은 세대가 가지는 또 다른 무기력함의 표현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장그래는 기존 시스템에서 버티는 것에 몰두하는 캐릭터이며, ‘미생’은 그가 버텨내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드라마”라며 “이 드라마가 대중에게 위로를 준다는 것은 그만큼 뭘 해도 안 바뀌는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치적인 요소를 빼면 낙관적인 미래관이 지배했던 과거와 달리 2000년대 이후부터는 더이상 낙관하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이런 변화가 드라마 속 캐릭터에도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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