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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론 끝?…‘반기문 휴화산’

입력 | 2014-11-16 16:28:00

여야 ‘러브콜’에 “현직 충실” 선 긋기…정치 상황 따라 언제든 폭발 가능




11월 3일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회고록 ‘순명’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새정치민주연합 권노갑 상임고문(왼쪽). 10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가경쟁력강화포럼 토론회 모습. ‘2017년 대권지형 전망’을 주제로 한 이날 토론회에서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최근 일부 정치권과 언론 등에서 반기문 총장의 향후 국내 정치 관련 관심을 시사하는 듯한 보도를 하고 있다. 반 총장은 전혀 아는 바도 없고,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앞으로 여론조사를 포함한 국내 정치 관련 보도를 자제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한다.”

최근 ‘반기문 대망(大望)론’이 정치권에 휘몰아치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측은 11월 5일 공식 대응자료를 냈다. ‘업무에 충실하겠다’는 말인데, ‘대통령선거(대선) 불출마’를 단정하지 않고 ‘현직 충실’을 강조한 만큼 출마 퇴로를 열어놓았다는 해석도 나왔다.

반기문 대망론은 한길리서치가 10월 17, 18일 이틀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반 총장이 39.7%라는 압도적인 대선후보 지지율을 보이면서 불이 붙었다. 2위 박원순 서울시장(13.5%)과 3배 가까운 차이를 보였다. 과거 10%대를 유지하던 반 총장 지지율이 40%대 가까이로 뛰어오른 것이다.


집권 2년 차에 이례적인 일

현직 대통령 집권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유력 차기주자가 떠오른 것도 이례적이지만, 반기문 대망론은 친박(친박근혜) 의원들이 군불을 때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10월 29일 친박 중심의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이 ‘2017년 대권지형 전망’이라는 주제로 연 토론회에서였다. 새누리당 안홍준 의원은 “반 총장 임기가 2016년 12월 31일까지고 대선은 그다음 해 12월이다. 시기적으로 딱 맞다. 당내 인사로 정권 창출이 어렵다면 대안으로 반 총장 카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한 유기준 의원은 “(야당과 여당 후보군의) 지지율이 크게 차이 나서 언론에서 (반 총장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다”고 거들었다. 이 토론회에는 서청원 최고위원과 홍문종, 윤상현 의원 등 친박 의원 20여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을 하려고 국회에 온 날이었다.

토론회는 일부 의원이 문제제기를 하면서 급히 마무리됐지만, 11월 3일 ‘동교동계 좌장’인 새정치민주연합 권노갑 상임고문이 “반 총장 측근들이 6개월 전 찾아와 ‘(반 총장이) 새정치연합 쪽에서 대선후보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우리가 (반 총장을) 영입해 경선을 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파장은 더 커졌다. 이어 정대철 상임고문도 “반 총장이 도전하면 웬만한 후보는 양보할 것”이라고 되받았고, ‘서로 다른 정파가 동시에 영입설을 제기할 정도면 뭔가 있는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았다.

결국 반 총장이 ‘업무 충실’ 성명을 내면서 일단락되는 분위기이지만 반기문 대망론은 언제든 고비마다 되살아날 공산이 크다. 당초 반기문 대망론이 튀어나온 가장 큰 이유는 여론조사 지지율 때문이다. 현실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백마 탄 초인’을 기대하는 국민적 심정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높은 인지도와 글로벌 리더 이미지 △환경, 여성, 아동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지도자라는 인식 △외교관 생활 36년간 큰 흠결이 없었던 점 △역대 대선에서 캐스팅보트 구실을 한 충청권(충북 음성) 출신 △세대별 고른 지지층 확보 △해외 연수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은 40대에 어필할 수 있는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본인의 부인에도 ‘군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 이유다. 반 총장을 잘 아는 외교가의 한 고위직 인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개헌 논의가 이원집정부제(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한 제도)로 흐른다면 반 총장은 외치(外治)를 담당할 최고 카드가 아니겠나. 우리도 외교관 출신 대통령이 나올 때가 됐다. 예단할 수 없지만 반 총장이 지향한 세계 평화와 다양성 존중, 동성애자 인권 같은 가치들은 야당 가치와 맞는 만큼 야당 쪽 후보가 될 거 같다. 다만 퇴임 후 곧바로 정치에 뛰어들면 지난 10년간의 ‘반기문 가치’가 훼손될 테고, 대권에 실패하면 더욱 그럴 거다.

퇴임 후 몇 년 지나 과거는 과거로 볼 수 있게 되면 정치 행보는 가벼워지겠지만, 그땐 나이(1944년생)가 너무 많아진다. 반 총장 역시 이런 리스크를 충분히 아는 만큼 처신을 잘할 걸로 본다. 다만 정치권에서 반 총장 측근 인사 운운하며 말을 전하는데, 내가 아는 반 총장은 측근을 정치권에 보내 의중을 떠보는 스타일이 아니다. ‘자생적 측근’ 인사들은 자제해야 한다.”

그러나 반기문 대망론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이도 많다.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한 것도 유엔 사무총장 프리미엄 덕이 컸고, 정치권이라는 진흙탕 밖에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홍성걸 국민대 교수는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정치인들에게 현재의 정치 상황은 불리하기 마련이고, 현 정치인에 대한 실망감이 여론조사에 반영됐다”고 지적한다. 조사에서 ‘반 총장이 나올 경우 차기 대통령으로 누가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설문 문항에 반 총장 이름만 거론돼 집중효과에 따른 허수가 끼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여기에 권력 의지가 약한 것도 약점으로 꼽힌다.

박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인 새누리당 한 의원은 “고건 전 국무총리와 안철수 의원의 사례에서 보듯, 국민이 나오라고 부탁해 마지못해 나온 듯한 인물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했고, 새정치연합의 한 의원은 “정치 조직은 씨줄과 날줄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어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 정당도, 조직도 약한 인물이 대선에서 승리하기란 우리나라에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지지율 1위 ‘레버리지 효과’


그렇다면 당초 새누리당 친박 의원들이 반기문 대망론을 먼저 들고나온 이유는 뭘까. 일각에선 ‘김무성 견제용’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0월 16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정기국회 후 개헌 봇물’ 발언으로 청와대 심기를 건드리고, 조직강화특별위원회가 ‘친박 원외위원장 물갈이론’을 거론하자, 다급해진 친박 의원들이 반 총장을 끌어들였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한 친박 중진의원도 최근 ‘주간동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김 대표는 개헌론과 사내유보금 과세 반대, 원외 친박 인사 물갈이 논란 등으로 일부 친박 의원의 불만을 샀다. 그 와중에 반 총장이 압도적 지지율 1위라는 보도가 났는데, 좋은 (대선)후보인 만큼 (반 총장 영입설) 얘기가 나온 것으로 안다. 차기 대권을 꿈꾸는 김 대표에게는 ‘대선후보가 안 될 수도 있다’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던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정치권 인사는 이를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로 설명한다. 빌린 돈을 지렛대 삼아 투자해 이익을 발생시킨다는 전략이다.

“김 대표 견제는 물론,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박 시장을 견제할 필요도 있었다. 현재처럼 박 시장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자칫 과거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당대표의 관계처럼 박 시장이 박 대통령의 대척점이 될 수 있다. 차기 총선에서도 야당 후보들이 박 시장 마케팅을 한다면 여당은 난감해진다. 따라서 압도적 1위인 반 총장을 활용해 박 시장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 야당 역시 내년 초 전당대회를 앞두고 문재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친노(친노무현)계를 견제하려고 반 총장을 끌어들이는 거 아닌가.”

결국 반 총장의 향후 정치 행보는 알 수 없지만, 반기문 대망론은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정치권의 각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측면이 크다. 갑자기 해외에서 활동 중인 유엔 사무총장에게 민심이 쏠리는 것도 여야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다. 정치권은 레버리지 효과를 노린다지만 자칫 과도하게 돈을 빌려 무리하게 투자하면 ‘부(負)의 레버리지 효과’로 도산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석현 국회부의장의 일침은 의미있다.

“게으른 농부가 참외 농사는 안 하고 야산으로 개똥참외 주우러 다니는 격이다.”

배수강 기자 b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