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산업부 부장
한이헌 당시 대통령경제수석은 그해 8월 “안정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호언했다. 일각에서는 ‘문민(文民) 호황’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이 호황은 오래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수출 증가를 주도한 요인이 ‘슈퍼 엔고’ 현상이었기 때문에 외환시장의 흐름이 바뀌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엔저라는 거시적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거시적 정책이 절실했지만 YS 정부는 엉뚱하게도 ‘경쟁력 10% 강화’라는 미시적 대책을 들고 나와 기업들을 닦달했다. 결과는 환란(換亂)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라는 치욕이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환란의 기억을 끄집어낸 이유는 환율 문제에 대해 잘못된 대응을 하거나 타이밍을 놓쳤을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지, 경제정책 결정자들이 잊어버린 것 같아서다.
최근 엔저 현상이 지속되면서 자동차 조선 화학 등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이 휘청거리고 있다. 그 여파로 한국 경제는 작년 4분기 이후 4개 분기 연속 0%대 성장을 했다. 과거에 비해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가공할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기업들로부터도 협공을 당하고 있어서 상황이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경제정책 결정자들의 상황 인식은 한가하다 못해 낭만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안종범 경제수석은 이달 초 경제정책 브리핑에서 “엔저를 투자 확대의 기회이자 기업 체질 개선을 통한 경쟁력 강화의 기회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 수석은 또한 “지금은 가격경쟁시대가 아닌 창조경제시대인 만큼 기술과 아이디어를 통해 경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며 “우리 경제의 활력을 높이고 체질을 개선하는 데 전력을 다할 예정이다”라고 강조했다.
기술과 아이디어를 앞세운 창조경제로 엔저 환경을 헤쳐 나가겠다는 안 수석의 발상은 거시적 증세(엔저 현상)에 미시적 처방(경쟁력 10% 강화)을 했던 YS 정부 경제참모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창조경제가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좋은 영양제일 수는 있지만 영양제로 암을 고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포크는 샐러드를 먹는 데는 안성맞춤이지만 수프를 떠먹는 데는 무용지물이다. 제발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앞뒤가 맞는 엔저 대책을 세우기 바란다.
천광암 산업부 부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