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국제부장
오키나와를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은 외신이었다. 오키나와 현이 일본 정부와 불화를 겪고 있다는 소식이 종종 전해지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 왕국이었다. 1609년 사무라이 3000명의 침공을 받았고 1879년 결국 일본에 병합됐다. 이후 류큐 왕국은 점차 ‘오키나와’로 바뀌어 갔다. 고유한 말 대신 ‘국어’인 일본어를 써야 했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불러야 했다. 곳곳에 신사가 세워졌으며 학교에서는 교육칙어 암송이 의무가 됐다. 일제강점기 한국과 류큐 왕국은 비슷한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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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본섬에서 30km 떨어진 도카시키 섬에서도 1945년 3월 집단자살이 벌어졌다. 섬 주민 절반인 약 300명이 숨졌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뒤 일본군이 미리 준 수류탄을 터뜨렸다. 불발탄이 많아 가장이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아들이 어머니와 형제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아 올해 85세가 된 긴조 시게아키 씨는 7월 류큐신문에 이렇게 말했다. “지옥의 한 장면이었어요.”
오키나와에서는 한국인도 1만 명가량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에는 ‘조선 삐과’들도 있다. 삐과는 오키나와 말로 위안부를 가리킨다. 오키나와 및 인근 섬에 모두 51명의 위안부가 배속됐다. 하지만 오키나와에까지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은 1972년에야 알려졌다. 도카시키 섬에 끌려갔던 최봉기 할머니가 그즈음 특별체류허가 신청을 하면서 드러났다. 할머니는 전쟁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허드렛일을 하며 국적 없이 오키나와를 떠돌았다.
할머니와 함께 도카시키 섬에 있던 위안부 6명은 미군 폭격으로 숨지거나 뿔뿔이 흩어져 연락이 끊겼다. 그중에는 16세 위안부도 2명 있었다. 어릴 때 살던 빨간 기와집을 위안소로 내준 한 여인의 기억이다. 작가 가와다 후미코 씨는 할머니의 구술을 토대로 ‘빨간 기와집’을 펴냈다. 할머니는 77세이던 1991년 풍파 많던 삶을 마감했다. 그는 생전에 한국에서 남의집살이 하는 친언니의 소식을 전해 듣자 자기 신세를 빗댄 듯 이렇게 말했다. “가련한 태생이라는 게 이런 거지요.”
일본 정부는 최근 오키나와 현의 한 섬에 집단자살은 미군 탓이라는 내용의 사회교과서 채택을 밀어붙였다. 한국에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면서 실제로는 무효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래 가지고서는 오키나와 주민들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가슴속 한이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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