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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기만 하고 줄이지 않는 법령 4836개… 국민-기업 옥죄어

입력 | 2014-08-27 03:00:00

[국가대혁신 ‘골든타임’]<3>정부, 이보다 더 비효율적일 순 없다
법령 간소화 하자




질문 하나. 일반적으로 농민들은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안에 농업용 창고를 지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부 A 씨는 자신이 소유한 그린벨트 안의 땅에 창고를 지어 경운기 보관 장소로 쓰고 있다. A 씨의 행위는 적법할까. 정답은 ‘불법’이다.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령’에는 그린벨트 내 창고에는 농수산물만 저장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제정된 이 법령은 올해 6월 법제처가 나서 개정을 추진할 때까지 유지됐다. 법제처는 국토해양부에 이 법령을 그린벨트 내 창고에 농수산물 외에 농기계도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고칠 것을 권고했다.

○ 언뜻 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법들

법은 법치주의 국가의 근간이자 삶의 지침이다. 법이 어려워지면 국민의 생활이 불편해지고, 기업의 영업 환경이 나빠진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이름만 봐서는 해독이 불가능한 어려운 법, 비슷비슷한 법이 많다.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가장 일반적으로는 형법(32장 강간과 추행의 죄)이 적용된다. 그러나 형법 외에도 여성가족부가 만든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법무부가 만든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등이 있다. 김현종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비슷비슷한 법이 많으면 국민이 혼란스러워한다”며 “이는 사회적 비용 증가로도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동일한 항목에 대해 제각각으로 규정해 놓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해양환경개선 부담금을 체납할 경우 해양환경관리법령상의 가산금은 ‘부담금의 100분의 3 또는 100분의 1’이다. 그러나 해양경찰청 훈령에는 ‘부담금의 100분의 5’로 되어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하는 입장에서는 ‘부처 뺑뺑이’를 돌 수밖에 없다”며 “공장을 짓거나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때 각종 법령을 하나하나 찾아보다 보면 당연히 일의 진척이 늦춰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 늘어나기만 할 뿐 줄어들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법령은 총 4836개. 헌법을 중심으로 한 법률 1390개를 비롯해 대통령령과 총리령, 부(部)령, 각종 규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새로운 법령이 계속 만들어지는데, 손질이 필요한 예전 법령이 그대로 유지되다 보니 개수만 계속 늘어난다는 점이다.

법의 개수가 계속 늘어나는 것은 국회와 행정부 모두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는 공을 들이지만 기존 법을 삭제하거나 폐지하는 데는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시민단체들은 매년 발의법안 수를 기준으로 우수 의원을 선정한다. 이렇다 보니 일부 의원이 자구 몇 개를 고쳐 새로운 법안을 내는 것처럼 술수를 부리는 일도 적잖게 일어난다.

특별법 발의가 남발되는 것도 문제다. 기존 법령을 적용하거나 약간만 수정해도 소화할 수 있는데 굳이 ‘특별법’이란 이름의 새 법을 만들어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특별법을 ‘특별한 법’처럼 평가하는 기류가 강해 선수(選數)가 높아질수록 특별법을 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14대 국회에서 321건에 불과했던 의원 입법 발의 건수는 18대 국회 때는 1만2220건으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19대 국회의 경우 개원 이후 2년여 만인 올해 8월까지의 의원발의 건수는 1만238건에 이른다.

의원발의 법안의 가결률은 14대 국회에서는 37.1%였지만 19대 국회에서는 10.5%로 급락했다.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 10개 중 9개가 폐기처분되는 것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의 한 의원은 “체면치레나 보여주기, 지역구 민원 달래기용으로 법안에 대한 고민이나 검토 없이 발의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법사위 차원에서 폐기 처리하는 것이 마땅한 법안도 동료 의원들의 눈치를 보느라 계류시켜 놓는 경우가 많”고 털어놨다.

졸속 처리도 문제다. 국회는 지난해 12월 31일 오전 10시부터 올해 1월 1일 오전 5시 사이에 113개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통과된 113개의 법안 중 65개(58%)는 지난해 12월 30일과 31일에 발의된 것이다.

○ 뜻 모를 법률·행정용어도 여전

어려운 법률용어, 행정용어도 혼란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1987년부터 형사사건 판결문에 자주 사용돼 온 ‘권형성’이라는 말은 어떤 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 중 하나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됐다. 그러나 이 단어는 어떤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용어여서 이상하다는 말이 많았다. 그러다 최근 누군가 ‘균형성(均衡性)’을 흘려 쓴 것을 다른 사람이 잘못 보고 쓰기 시작했고, 이후 잘못된 표기가 계속 인용돼 온 것으로 확인됐다. 막힘을 뜻하는 ‘폐색(閉塞)’, 완화를 의미하는 ‘권해(寬解)’ 등의 행정 용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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