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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영식]북한의 조건 vs 남한의 조건

입력 | 2014-08-20 03:00:00


김영식 정치부 차장

19일 남북 고위급 접촉을 열자는 정부의 제안에 북한은 무응답이었다. 최소한 18일에는 가타부타 언급이 있었어야 할 터이지만 그마저도 없었다. 그 대신 18일 시작한 한미 연합 군사연습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을 두고 강도 높은 위협과 협박을 지속했을 뿐이다.

“우리(북)가 때리면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은 구실없이 얻어맞아야 한다.”(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17일) “(군사적 대응이) 예측할 수 없는 보다 높은 단계에서 취해질 것이다.”(외무성 대변인 담화·18일)

어쩌면 북한으로선 남북대화 제안에 답변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김양건 북한 노동당 비서가 17일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 등 방북단을 만나 “왜 하필 남북 고위급 접촉을 제안하면서 군사훈련을 하려 하나”라는 불만을 제기하며 “전제조건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한다. 당국 간 제안에 대한 적합한 채널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꺼풀 더 벗겨보자. 김 비서의 언급은 UFG 연습과 “핵을 머리에 이고…”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8·15 경축사 언급만 없었다면 뭔가 이뤄졌을 것처럼 말하는 것 같다.

이런 북한의 습관성 ‘요구’는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북한은 1990년대 초반에는 한미 연례 연합야외기동연습인 ‘팀스피릿’만 폐지하면 남북관계가 급작스럽게 좋아질 듯 외쳤다.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씨 송환, 대북 방송 중단, 주한미군 철수 등도 단골 주제였다. 일부 요구를 수용했지만 핵개발과 대남 위협을 지속하는 북한의 대남 접근 패턴은 바뀐 게 없다. 오히려 김정은 시대에 들어선 개성공단 가동 중단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했다가 갑자기 대화 모드로 들어가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등 냉온탕을 오가는 진폭 증대로 불안정성이 더 커졌다.

이는 주변 정세의 극단적인 변화 때문일 수도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에 힘이 빠지는 동안 중국과 일본은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이라크를 내전으로 몰고 가는 수니파 무장 반군 ‘이슬람국가(IS)’의 움직임, 러시아의 영토 야욕과 맞물린 우크라이나 사태…. 냉전은 물론이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과거의 질곡(桎梏)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하다.

북한도 이런 주변 정세 변화에 예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미사일을 쏘아 올리면서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 참석한다는 메시지를 동시에 보내는 것은 북한도 혼돈에 빠져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인도적 대북지원이 이뤄진다고 이런 북한의 행보가 일거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당장 통일이 어렵다고 남북관계 관리조차 뒤로 미뤄둘 수는 없다.

북한 강경파에게 힘을 실어줄 일방적인 압박 카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은 것부터 북한과 접촉하는 틈을 넓혀야 불안정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박 대통령이 말한 ‘작은 통로’의 출발점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18일 국회 발언에 아쉬움이 많다.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개·보수하는 등 수많은 계획을 말하면서도 ‘여건 조성 시’라는 조건만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UFG 연습만 없다면’이라는 북한의 접근 방식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북한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겠지만 장밋빛 전망만 열거하기보다는 실천 가능한 창의적인 접근법도 함께 내놓을 순 없었을까. 미증유의 국제질서 변화 속에서 과거 자료 재탕만으로는 새로운 남북관계를 기대할 순 없는 법이다.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