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들 삶 들여다보는 여행… 터키 어머니에겐 인내의 미덕을 다국적 여행객 모인 伊농가선 몸에 밴 사고대처법 배워 구릉 따라 작은 길을 걷다보니 명징한 생각과 언어 떠오르고 만나고 헤어지는 참의미 깨달아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여행자가 여행을 결심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내게 여행자가 된다는 것은 철저히 뒤로 물러나 구경꾼이 되어 여행에서 만나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굳이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도 그들을 ‘만나는’ 것은 가능하다. 나의 이러한 태도는 오랜 외국생활 속에서 타자와 자신 간에 적당한 간격을 놓고 살아온 하나의 방어기제인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초행길 유럽 여행에서 얼마나 많은 다양한 사람과 문화현상을 보고 관찰할 수 있었는지. 그들의 의상, 말하는 태도, 몸짓 하나가 모두 경이롭다. 특히 여성들의 눈에 띄는 의상과 열정적인 몸짓과 목소리는 오랜 여행에서 오는 지루함과 우울증을 벗어던지고 그들의 삶의 열정을 느껴보고 싶게도 한다. 프랑스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서도 얼마나 조신하고 여성적인지, 이탈리아 할머니는 얼마나 괄괄하고 씩씩한지. 그 더운 날씨에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터키의 어머니들은 가족의 중심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서두르거나 화내지 않았다. 인내의 미덕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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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숙객은 대부분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로, 여름휴가를 보낼 짐이 든 큰 가방들을 들고 속속 도착했다. 둘째 날 오후 저녁 식사를 준비할 테니 오겠냐고 물었다. 서너 살 되는 꼬마 남매를 데려온 가족은 낮에 시내 나가서 샀다고 손바닥만 한 종이가방에 과자를 담은 작은 선물을 여주인에게 주었다. 종이에는 아이들이 크레용으로 그린 서툰 그림이 장식돼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손님들은 옹기종기 모여 큰 접시에 담긴 소박한 음식 몇 가지를 덜어 먹으면서 그 집에서 직접 만든 레드와인을 마시고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에 빵을 찍어 먹었다.
한창 토스카나의 검푸른 저녁 하늘 위에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올라 있는 것을 바라보며 환성을 지르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 온 작은 남자아이가 물병을 들고 가다가 넘어져 유리병이 깨져서 손을 다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이는 울고 엄마가 뛰어나가고. 그래도 크리스티나는 여유 있는 몸짓으로 광으로 가더니 빗자루를 가져와 그곳을 깨끗이 치웠다.
투숙객들은 각자 그 사태에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달려들어 우려, 동정, 위로 등을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아이가 놀라고 상처도 나니 우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태도였다. 인생에는 굴곡이 있다. 예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곧 주인장이 ‘삐요삐요’라는 구급차 소리를 흉내 내면서, 소독약과 반창고가 든 상자를 들고 뒤뚱뒤뚱 우스꽝스러운 걸음을 짓고 돌아왔다. 그 집의 캄보디아 피가 섞인 스웨덴에서 온 피렌체대 유학생 출신 며느리가 정성스럽게 시어머니를 조력했다. 아이의 울음으로 약간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또다시 흥겨움을 띠게 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그리고 한국어, 영어 마구 섞어 웃고 떠들었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와 웃음과 음식을 나누면서 교류하고, 그러고는 자리를 마무리하고 친밀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불교에서 모든 원자는 매 순간 생, 주, 이, 멸, 즉 생기고 머무르고, 바뀌고 그리고 스러지는 네 과정을 끝없이 반복한다고 하는데 인생이 바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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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