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男 놔두고 여자만 처벌한 조선… 烈女는 국가적 폭압의 희생자일 뿐 ◇정절의 역사/이숙인 지음/424쪽·2만 원·푸른역사
조선 화가 신윤복(1758∼?)의 이승영기(尼僧迎妓). 봄날에 길을 걷는 기녀와 비구니를 묘사했다. 기녀임에도 얼굴만 내놓은 채 온몸을 감춘 그림의 역설적 표현처럼 숭배 대상이었던 여성의 정절은 자의가 아닌 남성과 국가 권력에 의해 강요된 타의적 행위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푸른역사 제공
이 책은 거칠게 말해 ‘은장도 자살은 결국 타살’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저자는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여성의 성(性)에 대한 관념이 ‘정절’이란 키워드 속에서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분석했다. ‘정절’을 강조한 조선의 역사는 한마디로 ‘잔혹했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숭고함으로 포장된 정절에는 우월적 지위의 남성, 나아가 국가 권력의 처절한 폭압이 숨어 있었다고 분석한다.
세종 9년(1427년). 당시 평강현감 최중기의 아내 유감동은 간통죄가 드러나 옥에 갇힌다. 간통 남성은 좌의정 황희의 아들 황치신을 비롯해 상호군(정3품 무관) 이효량, 해주판관 오안로 등 수많은 공신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잘못은 정절을 지키지 못한 유감동의 몫이 됐다. 결국 ‘간통남’들은 대부분 복직하고 유감동만 유배지로 보내진다.
조선 화가 김윤보(1865∼?)의 형정도(刑政圖). 한 여성이 품행이 불량했다는 이유 등으로 관가에서 회초리를 맞고 있다. 푸른역사 제공
백제 4대 개루왕(재위 128∼166년)은 금실 좋은 도미 부부를 질투했다. 도미 부인을 궁으로 불러 유혹했지만 그녀가 끄떡도 하지 않자 화가 나 도미의 두 눈알을 뽑은 후 배로 유배를 보냈다. 강가에 도착해 울부짖는 도미 부인에게 하얀 조각배가 나타난다. 배를 타니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고려시대 당시 도미 부인 설화는 ‘사랑하는 부부’ 이야기로 통했다. 하지만 조선 지도층은 도미 부인에 초점을 맞춰 ‘정절 이야기’로 변환시킨 후 조선 여성들의 롤 모델로 선정했다. 이후 정절은 효와 충처럼 조선의 통치수단이 됐다. 남편이 죽고 절개를 지키면 ‘절부(節婦)’, 남편이 죽은 후 따라 죽거나 남편을 죽인 적에 대항하다 죽으면 ‘열부(烈婦)’, 혼인약속만 한 신랑이 죽어도 절개를 지키면 ‘정부(貞婦)’ 등으로 세분화됐다. 실제로 태조∼명조 175년간 270명이, 선조∼순종 344년간은 850명이 정절의 표상으로 선정돼 포상을 받았다.
반면 정절을 못 지킨 실행녀(失行女)가 되면 처벌은 물론이고 자손들도 검열대상이 돼 관직 진입이 봉쇄됐다.
책을 덮으면 역사드라마나 영화 속 은장도를 든 여성들이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당시 비장했던 그녀들의 얼굴과는 달리 은장도를 든 손은 떨리고 있지 않았을까. ‘여인의 숭고한 정절’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정치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입과 손에서 나왔다. 저자는 강조한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