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노교수는 대화를 나누다가 가끔 반색을 한다. 마치 끼니 걱정을 하다가 해결된 것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에서 나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그때는 일기를 쓰는 게 숙제였고, 선생님이 일기 검사를 했다. 사실, 선생님이 읽는다는 것을 전제로 쓰기는 참 어렵다. 선생님을 의식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나의 프라이버시를 드러내지 않는 지점을 찾아야 했다.
차마 거짓 일기를 쓸 수 없어서 일부러 하는 행동도 있었다. 오늘은 독서, 다음 날은 엄마 심부름, 그 다음 날쯤엔 친구들과 숙제를…. 이렇게 일기의 소재가 될 건수를 고루 안배하여 행하다 보니, 저절로 모범생이 되고 ‘잘 쓴 일기’로 뽑혀 상을 받기도 했다.
아침 출근길에 광화문을 지나며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바라본다. 장수로서 훌륭한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나는 최악의 조건으로 싸워야 했던 절박한 전쟁터에서 붓을 들어 난중일기를 썼다는 점을 가장 존경한다. 만약 그 기록들이 없었다면 임진왜란 재구성이 얼마나 불완전했을까.
그런데 얼마 전에 방송프로에서 한 교수가 “이순신 장군이 평소 인품과 달리 난중일기에서 원균을 싫어하는 감정을 자주 언급했다”는 말을 했다. 누군가 읽을 것을 의식하지 않고 솔직하게 사소한 감정까지 적었다는 말이 흥미로웠다. 덕분에 500년이 더 지난 지금, 우리가 그 일기를 통해 전혀 성격이 달랐던 두 장수를 상상해 보는 즐거움을 누리니 새삼 기록의 중요성을 느낀다.
그날이 그날인 일상에서 특별한 일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일기를 쓰면 좋을 것 같다. 일부러라도 일깃감을 의식하여 행동하다 보면 어제와 다른 하루가 되고 그것이 쌓여 훗날 잘 살았다는 상을 자신에게 주게 될지도 모르겠다.
윤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