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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관료제라는 괴물

입력 | 2014-05-19 03:00:00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마리아 안토니에타 칼보라는 여성이 죽었다고 오빠가 사망 신고를 했다. 동생 몫의 유산을 노린 오빠의 음모였다. 얼마 후 마리아는 시청에 찾아가 자신이 살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무원은 믿어주지 않았다. 법정 투쟁을 벌이려 했지만 변호사도 사건을 맡아주지 않았다. 사망 기록이 있다는 이유로 죽은 사람이 돼버린 마리아는 현실보다 문서만 믿는 관료제의 폐단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인 로런스 피터는 1969년 수백 건의 무능력 사례를 연구해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조직의 구성원은 자신의 무능력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승진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피터 교수의 이름을 따 ‘피터의 법칙’이라고 한다. 조직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은 승진한다. 높은 직위에 오른 사람은 새로운 업무에 대해서는 무능하므로 자리만 보전하려고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조직 내에서 가장 무능력한 사람은 조직의 수장이다.

▷관료제의 대표적 폐해는 본질이 아닌 절차와 규칙에 대한 집착이다. 세월호와 관련해서도 매뉴얼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동안 정부가 만든 안전 관련 매뉴얼만 3200개라고 한다. 문제는 이것이 공무원의 밥벌이용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위계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관료제는 대중이 아니라 기득권 계층을 위해 작동하고 개혁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공무원의 무능과 무책임, 퇴직 관료와 현직 관료와의 유착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3일에는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고시·공시 위주의 공무원 채용 축소, 민간 전문가 채용 확대 등 관료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들이 쏟아졌다. 공무원 채용 방식이 바뀔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지망생들이 동요하고 있다. 채용 방식과 퇴출 시스템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관료제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공무원 조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관료제야말로 세월호를 침몰시킨 숨은 괴물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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