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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 음식강산]어화둥둥 ‘목포신안 병어천국’

입력 | 2014-05-14 03:00:00


덥다. 시부저기 봄이 가버렸다. 전혀 낌새조차 챌 수 없었다. 건성건성 간당간당 사는 탓이다. 그저 숨 쉬고, 밥 먹고, 닭 모이만큼의 벌이에 매달렸다. 어느새 찔레꽃 만발이다. 뒷산 자욱길에 하얀 꽃들이 산드러지게 웃는다.

그렇다. ‘오월의 며칠은 늦잠을 잘 수 없다/어머니가 이고 오신/달빛 열두 필/한 뜸 한 뜸 오려내어/찔레 덤불 위에 부려지면/찔레꽃향기 천지에 가득하다’(김종해 시인)

보리모개가 볼록하게 알이 뱄다. 병어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단댓바람에 신안앞바다 임자도로나 달려갈까. 목포 먹자골목 아무 집이나 들어가 매움 새콤한 병어비빔밥이라도 한 그릇 먹어볼까.

마침 오늘은 음력 사월 열엿새. 사리 즈음엔 바닷물이 쿠르릉 쿠르르 격렬하게 요동치며 한바탕 뒤집어진다. 이 틈을 타 병어가 우르르 연안으로 몰려온다. 저마다 개펄에 몸을 풀어 알을 슨다. 병어는 반달(조금)이 뜨면 시르죽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산달이라 몸이 찌뿌드드해서 그런가.

병어는 뽀얀 젖빛 흰 살이다. 몸매가 육감적이다. 살결이 곱고 부드럽다. 맛이 담백하다. 비린내가 거의 없다. 버터처럼 고소하고 감칠맛이 새록새록 난다. 서양 사람들이 ‘버터피시(butter fish)’라고 부르는 이유다.

뼈째 썰어 먹을 때의 꼬소롬한 맛. 막된장에 찍어 깻잎에 싸먹어야 찰떡궁합이다. 매옴한 풋고추와 얇게 저민 마늘을 곁들이는 것은 기본. 씹으면 씹을수록 쫀득쫀득 차지다. 노릇노릇 구워 먹으면 밥도둑이다. 기름 자르르, 김 펄펄, 고슬고슬 무쇠솥밥에 병어구이 한 점 올려 먹으면, 맴이 그만 오사바사해진다. 눈앞에 ‘날개 달린 꽃잎’이 훨훨 날아다닌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이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병어 얼굴은 청순하다. 맨드리가 곱고 해맑다. 은백색 잔비늘이 햇살에 눈부시다. 엽렵한 은빛 미인이다. 몸은 둥그스름한 납작(扁魚·편어) 마름모꼴. 등판 가운데가 뾰족하고 연한 푸른빛이 감돈다. 그 반대편 뱃구레도 고구마 자루처럼 불룩하게 삐져나왔다. 머리는 조그맣고, 목덜미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듯 없는 듯 축약이다. 옛사람들은 ‘축항어(縮項魚)’, 즉 ‘목 짧은 고기’라고 불렀다.

병어는 입이 ‘뛰뛰’하다. 보자마자 ‘뿅’이나 ‘쭁’ 글자가 떠오른다. 너무 작아 귀엽고 깜찍하기까지 하다. 어른 얼굴에 아이 입이 달렸다면 적절할까. 왜 입 작은 사람을 ‘병어주둥이’라고 하는지 끄덕여진다. 입 큰 사람은 ‘메기입’이라고 부른다. 대구(大口)입이라고 안 해서 다행이다.

이종수 시인은 노래한다. ‘병어보고 대구한테 시집가라 했더니/마냥 좋으면서도 아-쫑 해서 입이 조그맣고/대구는 좋아서 에헤헤 해갖구 입이 커졌단다’

혓바닥의 추억은 질기다. 자진모리로 도리질을 친다. 진양조로 느릿느릿 꾸역꾸역 애간장을 다 녹인다. 보리누름 철, 목포 저잣거리 웬만한 주막집은 ‘병어타령’으로 흥성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병어가 가들막가들막하다. 병어와 병어 사이엔 밑도 끝도 없는 술꾼들의 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한우낙지 탕탕이로 이름난 갯내음식당(061-281-3531)이나 서울식당(061-282-5227)에서도 병어회 싸먹는 들깻잎 냄새가 물큰 알싸하다.

곰살맞은 안도현 시인은 별스넥(061-283-8114)에서 덕자회 안주로 벌써 불콰하다. 상호가 무슨 분식집 같은데, 가보면 뜻밖에 깔끔하고 단정하다. 세 곳 모두 상동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10분 이내 거리.

병어는 어른 두 손바닥 합친 정도의 크기가 으뜸이다. 엄청 큰 ‘덕자 병어’는 병어와 사촌쯤 되는 친척이다. 병어보다 더 ‘퉁겁고’ 더 각이 졌다. 맛이야 말할 나위 없지만, 가격이 좀 나간다. 전라도 지방에선 흔히 덕자찜을 제사상에 올린다.

병어조림엔 햇감자가 딱이다. 무는 익었을 때 이빨이 푹푹 박히는 느낌이 좀 그렇다. 칼칼한 양념 국물이 질척거리는 것도 거슬린다. 울퉁불퉁 햇감자 두툼하게 썰어 냄비 바닥에 깔고, 퉁퉁한 병어 한두 마리 칼집 넣어 자작자작하게 조려 내는 게 안성맞춤이다. 처음엔 가스불을 괄게, 그 다음엔 중간불로 뭉근하게 비위를 맞춘다. 다 조려지면 그 위에 쑥갓 한줌 얹는다. 향긋하다.

양념 국물 살짝 밴 햇감자가, 위아래 잇몸 사이에서 밤고구마처럼 바스러지며 부닐 때, 한세상 먹고사는 게 뭔지, 웃고 있어도 살짝 눈물이 난다. 산다는 게 영 쿰쿰하고 던적스럽다. 문득 논물에 뭉게구름이 몸을 풀고, 앞산의 소쩍새 울음소리 아득하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