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展
《 1950년대 활동했던 화가들에게 캔버스에 유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사치였다. 불우한 시대를 살았던 화가 이중섭(1916∼1956)의 경우 종이 작품만 남아 있다. 캔버스에 그린 작품은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다. 아내에게 보낸 연애편지도 그림으로 대신했던 화가는 종이조차 여의치 못할 때 담뱃갑 은박지 위에다 그렸다. 이중섭의 연필화와 은지화를 포함해 이인성 박수근 김환기 박서보 서세옥 이우환 전광영 등 근현대 거장 30명의 종이 작품 120여 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
화가 이중섭의 ‘소와 새와 게’는 종이 위에 연필로 자신의 뜨거운 예술혼을 쏟아 부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비롯해 한국의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30명의 종이 작업을 한데 모은 ‘종이에 실린 예술혼’전이 5일부터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다.
전시장에는 종이에 유채물감으로 그린 작품(oil on paper)을 비롯해 드로잉 구아슈 수채화 등 다양한 작품이 망라돼 있다. 종이 작품을 재료의 성격을 달리한 독자적 장르이면서 작가의 내면과 예술세계를 엿보는 1차적 결과물로서 재평가하려는 시도다. 무료. 02-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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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군상’에는 그가 즐겨 그렸던 노인과 아낙네들이 등장한다. 갤러리 현대 제공
종이 작품은 캔버스에서 쉽게 파악되지 않는 작가의 내공과 실력을 학습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박수근의 ‘군상’은 그가 즐겨 그렸던 아낙네와 노인들이 모두 등장하는 스케치 작품. 강약을 조절한 선묘, 얇은 채색을 통해 조형적 완결성을 위한 화가의 고뇌와 노력을 살펴볼 수 있다. 장욱진의 종이 작업도 예술적 특징을 오롯이 드러낸다. 종이에 매직 마커로 쓱쓱 그린 듯한 작품인데 형상은 최소화하고 여백은 최대한 살려낸 특징이 살아 있다. 동양화가로 출발해 현대적 조형세계를 모색한 이응노 박생광 서세옥 등의 작품도 매력적이다.
○ 고뇌와 실험의 작품들
종이 자체의 물성을 집요하게 파고든 화가들도 눈길을 끈다. 한지의 속성을 작품으로 드러낸 권영우, ‘떼어내고 붙이기’를 반복해 목판화처럼 아름다운 화면을 연출한 정상화, 점을 일정하게 찍어나가면서 수행성을 담은 김기린의 작품은 종이와 사람이 하나로 일체화된 작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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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통해 장르에 대한 편견을 돌아보는 동시에, 한 작가의 예술적 성취의 이면에 자리한 ‘작가적 고뇌와 예술적 사색, 조형적 시험’을 깨닫는 것도 소중한 성과다.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