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소비자경제부 차장
블랙키가 지하로 들어온 건 20년 전.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 독일군이 진주하자 동네 건달 블랙키와 마르코는 지하 방공호에 마을 사람들을 숨기고 이들이 만든 무기를 레지스탕스에 팔아 큰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블랙키는 정부(情婦)인 여배우 나탈리아에게 치근대는 나치장교를 총으로 쏴 죽인 뒤 큰 상처를 입고 지하 방공호로 피했다.
지하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블랙키와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무기를 만들며 나치에 반격할 날만 기다리지만 그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오래전 전쟁이 끝났지만 밖에서 나탈리아와 살림을 차린 마르코가 성질 급한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두려워 계속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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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연방 출신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이 만든 영화 ‘언더그라운드’의 줄거리다. 1995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영화는 쿠스투리차 감독이 코믹 판타지 양식을 빌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으로 산산조각 난 옛 조국에 바친 비가(悲歌)다. 8월 말 터져 나온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을 보면서 언젠가 이 일을 한 번 경험한 듯한 ‘데자뷔(기시감·旣視感)’를 느끼다가 이 영화가 떠올랐다.
지하혁명조직 ‘RO(Revolutionary Organization)’ 130여 명은 5월 중순 반지하 강당에 모여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대학생들이 골방에서나 나누던 얘기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들에게 ‘미 제국주의’ ‘파쇼’와의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방공호 속 사람들이 땅속에서 탱크를 만들었듯 이들은 인터넷에서 ‘압력밥솥 사제폭탄’ 제작법을 찾고, 장난감 총의 무기 개조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이석기를 ‘V님’이라고 불렀다. 검찰이 기소장에서 ‘VIP’의 약칭으로 추정한 이 호칭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부조리한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하려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조직원 앞에서 “전쟁에 대비하라”고 목청을 높이면서도 자신은 선거광고 기획사를 운영해 번 돈을 미국에 유학 간 아들에게 보낸 이석기는 언더그라운드의 마르코를 더 닮았다.
여러 정황을 보면 RO 조직원들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들만의 시간 속에서 살아온 모양이다. 이들은 급변하는 한국 현대사의 저 뒤편에 처진 슬픈 잔재다. 세상 사람 모두가 변화에 적응하는 동안 그들의 시계만 멈췄다는 점에선 피터 팬의 후예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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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소비자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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