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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파탄 낸 ‘엉터리 불륜시약’

입력 | 2013-09-17 03:00:00

“속옷에 뿌리면 정액 묻은 부분 빨갛게 변해… 100% 감별” 허위광고




“단 10초 안에 (배우자의) 외도 사실을 알 수 있다.”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마우스를 움직이던 A 씨(42)의 손가락이 멈췄다. 온라인 광고 동영상에는 속옷에 ‘불륜 시약’을 뿌리자 정액이 묻은 부분이 붉게 물드는 장면이 나왔다. 화면 속에서 판매업체는 “확실히 답이 나오기 때문에 쓸데없는 의심을 없앨 수 있다”고 홍보했다.

평소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던 A 씨는 그 말에 흔들려 ‘구매하기’ 버튼을 눌렀다. 며칠 후 배송 받은 6만5000원짜리 시약을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속옷에 뿌렸다. 속옷은 광고 장면처럼 검붉은 색깔로 물들었다. 혹시나 했던 A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A 씨는 이를 들이대며 다그쳤지만 아내는 완강히 부인했다. 부부는 결국 민간 유전자연구소에 속옷 감식을 의뢰했다. A 씨가 철석같이 믿었던 불륜 시약은 엉터리였다. 정액은 검출되지 않았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면서 A 씨는 위기에 몰려 있다.

서울 동작경찰서는 2010년 6월부터 올해 4월까지 웹사이트를 통해 총 900여 명에게 7000만 원 상당의 불륜 시약을 판매한 혐의(사기 등)로 16일 이모 씨(68)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다른 불륜 시약 업체에도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주로 인터넷을 통해 판매되는 불륜 시약이 가정 파탄의 도화선이 되고 있다. 기자가 인터넷에서 ‘불륜 시약’ ‘외도 시약’을 검색하자 관련 사이트가 30개를 훌쩍 넘었다. 저마다 “배우자의 불륜 증거를 잡아낼 수 있다”며 소형 스프레이나 안약 용기에 담긴 시약을 판매했다. 관련 사이트에는 소비자 문의 글이 쇄도했다. 대부분 뚜렷한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배우자에게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업주들은 ‘확실한 물증’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며 시약 사용을 부추겼다.

경찰 조사 결과 현재까지 이런 불륜 시약을 판매하는 업체는 서울에만 9군데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모두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감정 결과 A 씨가 구입한 시약은 정액에만 반응하는 특수 물질이 아니었다. 판매업체에선 “노란 통의 약품을 먼저 뿌려 굳은 정액을 녹인 후 파란 통에 든 시약을 뿌리면 10초 안에 반응한다”고 광고했지만 노란 통의 물질은 에틸알코올이 0.025% 섞인 물이었고 파란색 통은 80%의 에틸알코올 용액에 미량의 페놀레드 가루를 녹인 것이었다. 국과수에 따르면 페놀레드는 산성도(pH) 8.2 이상의 알칼리성 물질에 붉은색으로 반응하는 산염기 지시약이다. 이 약품은 정액뿐만 아니라 알칼리성의 계란 흰자, 비누, 생수 등에서도 정도는 다르지만 붉은색 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일부 제품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천에 뿌려도 붉은색으로 변했다. 경찰 관계자는 “과학적 근거 없이 불륜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을 악용한 제품들”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온라인상으로 불륜 시약을 구매하는 행위 자체가 가정 내 신뢰 관계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전우영 충남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이런 제품들은 믿음이 불신의 정도보다 큰 경우에도 ‘저렴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작은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는 소비자 심리를 상업적으로 악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부부 간 신뢰가 무너지는 세태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회에 만연한 불신의 분위기가 일방적인 확인 행동을 부추기는 세태를 낳은 것”이라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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