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 앞마당에서는 학승들이 ‘딱새’를 합니다. 어둠이 내렸는데도 ‘딱새’는 그칠 줄을 모릅니다. ‘딱새’는 스님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서로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논박과 논증의 과정이 아주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왕궁의 앞마당에서 밤늦게까지 딱새가 용인되는 건 달라이 라마가 그 풍경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달라이 라마에게 이렇게 들었습니다. “거듭거듭 사유하고 분석함으로써 체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사견에 혹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왜 티베트 불교를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지요? 토론이 일상화된 서구문화에 영성을 보탰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토론은 이기기 위한 것이거나 남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지만, ‘딱새’의 과정은 토론을 통해 자기 편견을 깨고 전도된 사견을 없애기 위한 겁니다. 이기기 위한 토론은 내 것에 대한 집착과 다른 편에 대한 미움으로 갈등을 심화할 뿐입니다. 그것은 100분토론, 끝장토론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 ‘딱새’의 과정에서는 물음 자체가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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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에게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곧 죽을 사람 앞에서도 괜찮다고 하는데,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증거라고. 그는 죽음을 대면하고 명상해야 한다고 합니다. 죽을 때 마지막 의식이, 그 사람이 쌓은 업과 함께 다음 생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연스러운 말투에 나는 그가 환생을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생을 본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늘 테러의 목표가 되고 있는 법왕으로서 불안 없이, 분노 없이 어찌 저리 안정감이 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예수를 승복시킬 수 없었듯, 갈기갈기 찢음으로 오시리스를 죽일 수 없었듯 티베트를 짓밟음으로써 티베트의 정신을 승복시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중국은. 오히려 고통을 겪으며 예수가, 오시리스가 부활했듯 달라이 라마를 통해 티베트의 지혜는 인도의 오지에서 세계를 향해 번져갑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